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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식으로 인사하고 K팝 듣고...“한류, 일시적 파도 아니다”

한국식으로 인사하고 K팝 듣고...“한류, 일시적 파도 아니다”

Posted December. 31, 2019 07:40   

Updated December. 31, 2019 0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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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매실차를 맛보고 싶어요.”

 콜롬비아 보고타국립대에서 약학을 전공한 루이사 마리아 가르시아 씨(23·여)는 최근 한국인 친구로부터 허준의 ‘동의보감’을 추천받았다. 한국어를 공부한 지 4년. 동의보감 속 기(氣)의 원리나 민간요법들을 독학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실력이지만, 배움의 즐거움은 무엇보다 크다고 한다. “소화에 좋다”며 매실의 효능을 줄줄이 읊던 그는 “약재료부터 콜롬비아와 한국은 천지 차이다. ‘동의보감’은 새로운 세계”라고 말했다.

 가르시아 씨는 8년 전, 유튜브로 KBS 드라마 ‘꽃보다 남자’(2009년)를 보며 한국을 처음 알게 됐다. 드라마에서 방탄소년단(BTS) 등 케이팝(K팝)으로 관심을 넓힌 그는 졸업 후 한국의 약학대학원에 진학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한국에 가면 가장 먼저 도서관에서 들러 ‘동의보감’을 직접 보고 싶다던 그는 “양국 의학에 대한 비교 연구를 계속 하고 싶다”고 전했다.

 한류가 변하고 있다. 더 이상 한류는 콘텐츠 소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BTS의 음악, 영화 ‘기생충’ 등 한국의 대표 콘텐츠들이 해외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림과 동시에 한류는 세계인들의 일상, 나아가 이들의 삶을 뒤흔들고 있다. 본보가 해외문화홍보원, 세종학당을 통해 만난 전 세계 60개국 100명의 외국인들은 “한류는 해외에서 주류 문화가 되어가고 있다”고 입을 모았다.

○ K팝이 K전통으로

 가르시아 씨처럼 한류에 영향을 받은 외국인들 중엔 한국인보다 더 전통문화 전파에 앞장서는 이들이 많다. 나이지리아인 이시오마 윌리엄스 씨(49)는 한국을 처음 방문했던 2013년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꼽는다. 그는 “장구의 소리를 듣자마자 독특함에 매료됐다. 유사한 드럼이 많은 나이지리아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소리였다”고 회상했다.

 장구의 매력을 알리겠다는 목표를 갖고 나이지리아로 돌아간 그는 2014년부터 하루 3시간씩 유튜브로 사물놀이 공연을 보며 장구를 독학했다. 물론 어려움도 많았다. 무엇보다 학생들이 연주할 장구는 온라인으로 구매하기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장구 수업을 진행할 비용 문제도 컸다. 그가 전통 악기들을 조합해 직접 장구를 만든 것도 그 이유에서다.

 나이지리아 한국문화원의 도움을 받아 2016년 라고스에 첫 장구 강좌를 연 그는 현재까지 100여 명의 ‘장구 유망주’들을 배출했다. 최근엔 나이지리아 전통 드럼을 연주하는 그룹과 ‘컬래버레이션’ 공연도 펼쳤다. 그는 “장구 교육을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로 넓혀가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한국의 전통문화 중 사물놀이는 유독 아프리카에서 진입 장벽이 낮은 편. 케냐의 단짝 친구 하다사 은지오키 씨(22·여)와 윈프레드 나고하 씨(22·여)는 세종학당에서 사물놀이 동아리를 이끌고 있다. 열한 살이 되던 해, 아버지로부터 가야금을 선물 받았다는 은지오키 씨는 “어릴 때 듣던 아프리카 전통악기들과 소리, 리듬이 유사해 쉽게 빠져들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사물놀이 공연을 하는 가장 큰 이유로 “살아있음을 느끼게 해주기 때문”이라고 입을 모은다. 소극적인 성격도 장구를 연주하며 적극적으로 변해갔다. 중국과 한국의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현지인 속에서 이들은 나이로비 곳곳을 누비며 사물놀이를 알렸다. 나고하 씨의 꿈은 드라마에서 봤던 정비된 도로 등 한국의 선진 기술과 문화를 케냐에 도입하는 것이다. 은지오키 씨는 “한국 유학 후 전통음악과 음식을 케냐 사람들에게 전수하고 싶다”고 했다.

 앞서 한국관광공사가 10월 111개국 1만2663명 K팝 팬들에게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K팝에 대한 관심은 한국 음식(82.7%), 한국 드라마(79.1%), 한국어와 한글(63.8%), 한국 뷰티(63.7%) 등으로 확장됐다. 일반인 한국어 교육을 담당하는 세종학당 수강생도 지난해 6만 명을 돌파해 한국 문화 외연도 넓어지는 추세다.

○ 일상의 버팀목 돼준 한류

 때때로 한국인이 흘려듣는 K팝 가사들은 바레인의 5남매 중 셋째, 파티마 무함마드 씨(25·여)에게 삶의 버팀목이 됐다. 이슬람 금식 성월(聖月)인 라마단을 엄격히 지키고 공동체를 중시하는 가정에서 자란 그는 BTS의 노래 ‘Answer: Love Myself’를 들으며 “나를 사랑하거나 칭찬을 받아들이는 것이 거만한 일이 아니라고 깨닫게 됐다”고 말한다. 대학에서 회계학 공부를 하며 지칠 때마다 BTS ‘피 땀 눈물’ 가사를 곱씹었다. 그는 “내가 내린 결정을 존중하는 법을 배웠다”고 확신한다.

 많은 K팝 팬들은 “미국의 힙합이 지위, 재력을 강조한다면 K팝은 사랑, 희망, 연대 등을 노래한다”고 입을 모은다. “BTS의 노래를 들으면 나 자신을 사랑하고 밝은 미래를 믿고 최선을 다한다는 메시지가 떠오른다”고 한 러시아 K팝 팬도 있었다. 학창 시절 친구가 많지 않았던 가르시아 씨는 “한국 노래를 왜 듣느냐”는 조롱을 받을 때마다 휴대전화로 2NE1의 ‘내가 제일 잘나가’를 들었다. 그는 “BTS의 노래 가사 중 ‘꽃길만 걷자’는 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희망찬 문장”이라고 했다. 브라질에 거주하는 한 K팝 팬도 “따돌림을 당했을 때 집에 오면 항상 동방신기 노래를 들었다. 혼자 울 때 내 옆에 있었던 건 K팝뿐”이라고 전했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는 법을 알게 됐다”는 한 인도네시아인의 말처럼, K팝은 자존감 회복의 수단이 되기도 한다. 바레인에 거주하는 하나 알리 씨(25·여)는 유튜브로 K팝을 들으며 자유롭고 진취적인 여성상을 동경하게 됐다.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SM엔터테인먼트 오디션을 봤던 그는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한국 발라드를 부른 그 순간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는 “바레인에선 여전히 여성이 동일 임금을 받거나 자기 의견을 피력하기 어렵다”며 “K팝을 접하면서 모든 문화가 평등, 자유 등 가치를 담고 있어야 한다는 확신이 생겼다”고 말했다. 인간관계의 외연을 넓힌 이들도 적지 않다. 베트남에 거주하는 한 한류 팬은 “BTS의 사진, 글을 트위터에 공유하며 외국인 친구들을 사귈 수 있었다. 내 세계관이 확장된 것”이라고 했다.


신규진 newj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