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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5•4운동 100주년

Posted May. 04, 2019 07:58   

Updated May. 04, 2019 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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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의 독립선언문을 각 학교 교문이나 묘당에 붙여두고 자극을 받아 군벌이나 외세 등 압제자를 타도하는데 노력해야 한다”. 중국 상하이스바오(上海時報)는 1919년 5월 4일 사설에서 두 달여 앞서 일어난 3·1 운동의 교훈을 이같이 피력했다. 오늘 100주년을 맞는 중국의 5·4 운동과 한국의 3·1운동은 그렇게 항일과 반봉건의 정신에서 맞닿아 있다.

 ▷5·4 운동의 발단은 1차 대전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에서 패전국 독일이 산둥성에서 가지고 있던 이권을 일본에 넘기도록 승인한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앞서 북양군벌 출신 총통 위안스카이가 일본에 각종 이권을 넘겨주는 ‘21개조 요구’를 수락해 불만이 높아가던 차에 기름을 부은 것이다. 5월 4일 톈안먼 광장에서 베이징대 학생 주도로 3000여 명이 대규모 시위를 벌인뒤 시위대가 친일 매국노 3인방’ 중 한 명인 군벌 정부의 교통총장 자오루린의 집으로 몰려갔다. 이들은 응접실에 일본 천황의 사진이 걸려있는 것을 보고 격분해 집을 불살랐고 군벌 정부는 이 사건에 가담한 32명의 학생을 체포했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베이징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시민들의 항일 및 반군벌 정부 운동이 확대됐다.

 ▷중국인들은 당시 일본인들을 ‘구이즈(鬼子·귀신)’라고 부를 정도로 싫어하면서도 주눅들어 있었다. 식민지 조선을 동정하면서도 부패와 무능 때문에 망했다며 무시하던 중국인들은 3·1운동을 보고 인식이 완전히 바뀌었다. 그해 4월 상하이 임시정부 수립에 호의적이었던 것도 3·1 운동의 영향이었다고 부산대 배경한 교수는 말했다. 후에 공산당 초대 총서기가 된 신문화 운동의 기수 천두수는 “조선의 독립 운동은 위대하고 절실하며 민의에 의한 무력에 의거하지 않는 세계 혁명사의 신기원”이라고 평가했다.

 ▷5·4 운동은 중국 역사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 등장한 사건이자 주권의식을 표출한 첫 시민운동으로 현대사의 출발점이다. 중국 공산당 창당도 5·4운동에서 싹튼 대중의 주권의식이 토양이 됐다. 지난달 30일 5.4 운동 100주년 기념식에서 시진핑 주석은 ‘애국’은 19번 언급했지만 ‘항일’은 거론하지 않았다. 일본과 다시 가까워지려는 정치적인 고려 때문으로 풀이된다. 또 다른 키워드인 ‘민주’가 전혀 언급되지 않은 것은 자신의 권력 강화와 배치되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내후년 창당 100년을 맞는 공산당이 5·4 운동의 기본 정신으로 반제(애국)과 함께 민주도 퇴색시키지 않기를 바란다. 


구자룡 bonh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