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플래시100]동아일보를 사랑한, 동아일보가 사랑한 ‘석호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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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20년 2월 10일 16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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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4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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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
2000년대 ‘미드’ 열풍을 일으킨 폭스TV의 ‘프리즌 브레이크’(Prison Break)의 주인공 스코필드를 기억하십니까. 한국에선 그를 ‘석호필’이란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지요. 그런데 석호필의 시조는 그가 아닙니다. 한참 거슬러 올라가 한국을 조국처럼 사랑한 의학박사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1889~1970)가 원조 석호필입니다.

스코필드는 1919년 3·1운동 직전에 독립선언문을 영어로 번역하고 거사 당일에는 파고다공원 만세시위 현장을 사진에 담아 세계에 알려 ‘34번째 민족대표’라고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후에도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건 진상을 고발하는 등 일제의 만행을 여러 차례 폭로한 공로를 인정받아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석호필(石虎弼)’이라는 한국 이름을 즐겨 사용했다 합니다. 발음이 비슷할 뿐만 아니라 ‘돌처럼 의지가 굳고(石), 호랑이 같이 강하며(虎), 어려운 사람을 도울 줄 아는(弼)’ 사람이 되겠다는 뜻이었기 때문이죠.

고종 황제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 대한문 앞을 지나는 황제의 대여. 스코필드 박사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고종 황제 인산일인 1919년 3월 3일 대한문 앞을 지나는 황제의 대여. 스코필드 박사가 직접 촬영한 것이다.
그런 스코필드의 이름이 1920년 4월 1일 동아일보 창간호에 두 번이나 등장합니다. 하나는 4월 1일부터 태형을 폐지한다는 보도에 이은 ‘구십도는 태심’이라는 기사입니다. 기사는 그의 말을 인용해 ‘태형으로 말하면 20대까지가 극상(極上)이라 말하겠고, 90대까지 때리는 것은 사람의 몸으로 이 형벌을 감당하기에 너무 혹독하다’고 돼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직접 기고한 ‘조선발전의 요결’입니다. 세브란스 의전에서 세균학을 가르치던 스코필드 박사는 이 글에서 조선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네 가지 즉 교육, 근면과 실업(實業), 재정, 도덕을 역설했습니다. 특히 교육에 관해서는 단순히 ‘생각’하게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교육을 받고 민중을 위해 그 지식을 쓰지 않으면 정당하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면서 시간을 허비하지 말고 ‘동아일보나 혹은 기타 선량한 신문을 애독하라’고 간곡히 권했습니다.

이 당시 스코필드 박사는 혈기왕성한 31세 청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글의 곳곳에서 그의 거침없는 생각과 행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나옵니다. 한 예로 그는 조선의 저주는 나태함에 있다면서 끽연과 잡담으로 소일하는 조선 남자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고 비판했습니다. 심지어 추운 겨울 한 여자가 힘들게 시멘트를 섞는 모습을 조선 남자가 긴 담뱃대를 물고 수수방관하는 광경을 보고 분노를 참지 못해 구타한 일까지 있다고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동아일보 창간 49주년 기념일인 1969년 4월 1일자에 창간호 기고 ‘조선발전의 요결’에 대해 다시 한번 글을 보내왔습니다. 여기서 그는 창간호에 기고했던 까닭은 고등교육과 자유로운 신문의 보급으로 국민을 계몽한다는 이념을 갖고 있었던 동아일보 설립자 김성수 씨 등의 부탁 때문이었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는 스코필드 박사를 주요 취재원으로 여겼습니다. 창간호 외에도 그가 일본에서 발행하는 영자신문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기고한 ‘한국에서의 개혁’을 번역해 1920년 4월 23일부터 ‘조선통치 개량에 대한 외국인의 관찰’이라는 칼럼을 15회 연재했습니다. 본질은 변하지 않은 채 기만적인 ‘문화주의’를 내세워 한국 국민을 억압하는 일제의 통치를 비판한 글이었습니다. 이 중에는 친일 선교사 헤런 스미스가 스코필드를 비판하고 일제를 옹호하는 글을 ‘재팬 애드버타이저’에 연재하자 이를 읽고 같은 신문에 기고한 반론을 번역한 ‘스미트 씨의 조선통치론에 대한 스코필트 씨의 논박’도 포함돼 있습니다.

일제는 눈엣가시 같았던 스코필드 박사를 캐나다로 돌려보냈지만 1958년 국빈으로 한국에 돌아와 1970년 4월 12일 생을 마칩니다. 며칠 후인 4월 16일자 신문에 ‘스코필드 박사 병상 단상록’이 실릴 만큼 그와 동아일보의 관계는 각별했습니다.

정경준 기자 news91@donga.com

과거 기사의 원문과 현대문은 '동아플래시100' 사이트(https://www.donga.com/news/donga100)에서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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