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김영식]통일준비위원회가 버려야 할 것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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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정치부 차장
김영식 정치부 차장
대통령 직속 통일준비위원회(통준위)는 뭘 준비해야 할까.

학계 전문가로 구성된 민간위원 30명, 관련부처 장관 8명 등 위원 81명으로 출범한 통준위가 7월 15일 공식 발족한 지 2개월을 맞이하고 있다. 8월 7일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한 가운데 1차 회의를 개최한 데 이어 추석 연휴 직전인 5일 전체 워크숍을 열어 중장기 과제 등을 논의했다. 아직 초기여서 평가하기엔 이르지만, 통준위의 초기 행보로 전해지고 있는 소식들을 접하니 답답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통준위는 지난 주말 통일헌장을 만들기 위한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일부 위원은 통준위 산하 국제특보단에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을 영입하는 방안도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 어느 것도 신선하지 않은 얘기다.

통일헌장을 만드는 작업을 두고 위원들 간에 논란이 벌어졌던 것으로 알려졌다. 통준위 관계자에 따르면 1968년 12월에 만들어진 국민교육헌장을 떠올리게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고 한다. 용도가 뭔지, 심지어 예전에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국민교육헌장을 달달 외웠던 것처럼 통일헌장도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로 나오게 할 거냐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있었다는 것. 전직 고위 정부관계자는 “헌장을 만들어 통일의식을 결집하는 시대는 이미 지나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며 “급변하는 국제정세 속에서 우리의 정확한 좌표를 잡는 대신 모여 앉아 자구나 고친다면 무슨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키신저 전 장관이나 다른 해외의 저명인사들과 연계를 마련하는 작업도 물론 중요한 일이다. 아이디어 차원의 얘기라곤 하지만 91세 고령으로 최근 심장 수술을 받은 그가 어떤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정작 더 큰 문제는 키신저 장관이나 다른 해외 석학들의 의견을 듣는 일은 외교부 통일부 등 정부 관련부처에서 상시적으로 하는 일이라는 점이다. 다른 기관이 할 수 있는 일에 어렵게 구성된 통준위가 굳이 나설 필요가 있을까. 기껏해야 두세 번 만나 의견을 듣는 데 그칠 가능성이 높은데도 말이다.

남북관계에는 대화가 꽃피던 시절도 있었지만 대결 구도가 심화되던 시기도 있었다. 냉전 시기엔 미국과의 협력만 강화하면 됐다. 하지만 미중 갈등이 커지고, 군사대국화를 진행하면서 중국과 대립하는 일본이 북한과의 관계 개선을 물색하는 복잡한 현재의 국제질서에선 남북문제의 구조 자체가 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한반도 문제의 국제화가 지금처럼 심화된 적이 없다는 얘기다. 참여자가 많을수록 한반도 문제는 남북 관계만으로는 풀기 어렵지만 정작 남북은 대화 같은 대화조차 나누지 못하고 있다.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선 남북문제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접근 방법이 필요하다. 통준위가 출범한 것도 이런 시대적 요청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쉽지는 않다.

무엇을 할지 정하기 어려운 출발점에선 의무감으로 준비할 일을 늘어놓기보다는, 오히려 하지 말아야 할 리스트부터 정하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통준위는 통일부 외교부 청와대국가안보실 등 다른 기관이 할 수 있는 일,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전략을 답습하는 일은 하지 말았으면 한다. 어디서 본 듯한 문서를 만들거나 일회성 행사를 개최하는 일만은 특히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미 남북기본합의서나 각종 남북합의에 대부분 포함되어 있다. 성과에 대한 집착도 버렸으면 한다. 그래야 통준위가 정부 부처와의 업무 중복을 피하면서 무엇을 준비할지 명확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것 같아서 하는 얘기다.

김영식 정치부 차장 spear@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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