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우연성 무시, 이젠 낡은 해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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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1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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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H카의 명저 ‘역사란 무엇인가’ 비판서 펴낸 허승일 교수

이성에 근거한 ‘역사의 필연성’만 강조
우연 자체의 원인을 캐는 것이 합리적

역사철학비판서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를 펴낸 허승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원조로 알려진 니체의 사상에 대한 역사학계의 오해가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서울대출판문화원
역사철학비판서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를 펴낸 허승일 서울대 명예교수는 “근대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원조로 알려진 니체의 사상에 대한 역사학계의 오해가 있었다”고 말했다. 사진 제공 서울대출판문화원
39년 전인 1971년 봄. 당시 처음으로 서울대 강사가 돼 강의를 맡은 허승일 교수는 첫 수업 시간에 E 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꺼내들었다. 1961년 국내 출간된 이 책은 당시 금서 목록에 포함돼 있었다. 허 교수는 “그 사실도 모른 채 학생들에게 학기말 리포트를 써서 제출하게 할 정도로 그때는 이 책에 심취했다”고 회상했다.

오늘날 서울대 명예교수가 된 허 교수가 최근 ‘다시, 역사란 무엇인가?’(서울대출판문화원)를 펴냈다. 그는 이 책에서 카의 역사철학에 의문을 제기하고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현대까지 역사철학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정리했다. 예전에 심취했던 카에 대해 그는 책에서 ‘가증스럽다’고까지 표현하며 비판했다.

“카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교묘한 수사학적 기교를 사용해 마치 이전에 없었던 새로운 주장을 하는 양 말하고 있죠. 그래서 ‘가증스럽다’고 한 것입니다.”

허 교수는 “올해로 ‘역사란 무엇인가?’가 나온 지 50년째고, 그동안 역사철학은 엄청난 변화를 겪었다”며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는 명제만을 되뇌는 데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카는 역사에 우연이란 없다고 보고 역사를 이성적 합리적으로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과거와 현재의 시간적 간극을 고려하지 않은 역사 인식입니다.”

허 교수는 책에서 독일의 해석학자인 한스게오르크 가다머(1900∼2002)를 카와 대비시켰다. 가다머는 과거의 역사지평(당대를 둘러싼 정치, 경제, 제도적 상황 혹은 틀)을 통해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는 이론을 펼쳤다.

허 교수는 “카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이면 역사 속의 우연이 이성에 의한 필연적 결과라고 논증하는 데만 노력을 쏟게 된다”며 “그보다는 우연 자체에 대해 따져보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고 말했다. 책은 이 외에도 철학의 역사화를 시도한 리처드 로티,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강조한 외른 뤼젠 등 다양한 역사학자의 사상을 소개했다.

책의 절반가량은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랑케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원조라고 알려진 니체의 사상을 그동안 역사학계가 잘못 이해하고 있었음을 밝히고 이들의 역사철학을 소개하는 데 할애했다.

“‘나 자신을 말살하고, 과거로 하여금 말하게 하라’ 같은 랑케의 명제를 지나치게 부각한 탓에 랑케는 마치 과거에만 집중하는 역사가인 양 이해됐습니다. 하지만 랑케는 역사가로서의 자신을 숨기고 그 대신 독자의 역사적 상상력을 최대한 끌어냈던 역사가였죠.”

허 교수는 “‘역사병’이라는 말을 만들어냈던 니체도 랑케의 저작을 읽은 뒤에는 ‘처음으로 역사를 보는 눈을 얻었다’고 표현할 정도로 역사적 진리의 중요성에 주목했다”며 “니체를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원조로 보기보다는 근대 역사학의 새로운 경향 중 하나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했다.

허 교수가 생각하는 역사는 ‘진실을 탐구해 그것을 후세에게 영대(永代)의 재산으로 물려줘 그들의 삶에 유익함을 주기 위한 학문’이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이 19세기 말 영국의 노동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태어난 역사철학인 것처럼,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삶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방법 자체가 이미 역사철학인 셈입니다. 그러니 우리 개인은 모두 역사철학자이고, 기존 역사철학을 공부함으로써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겠지요.”

이새샘 기자 iamsa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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