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사가 정두수 씨 등 지인들이 회고한 故 박춘석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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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0년 3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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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의 매일 밤샘 작업하며 곡 쏟아내
인간적인 면모에 후배들 많이 따라

작곡가 박춘석, 가수 남진과 나훈아, 작사가 정두수 씨(왼쪽부터)가 한 방송에 출연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박 씨와 정 씨는 
1960년대 중반부터 500여 곡을 함께 작업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작곡가 박춘석, 가수 남진과 나훈아, 작사가 정두수 씨(왼쪽부터)가 한 방송에 출연해 얘기를 나누고 있다. 박 씨와 정 씨는 1960년대 중반부터 500여 곡을 함께 작업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곡 작업을 하느라 낮밤이 뒤바뀐 생활을 했어요. 당시에는 통행금지가 있어 못다 한 얘기를 하느라 밤새워 전화통을 잡고 있었던 기억이 나네요.”

작사가 정두수 씨(73)는 14일 타계한 작곡가 박춘석 씨와의 일화를 묻자 고된 밤샘 작업을 먼저 떠올렸다. 그는 박 씨와 1960년대 중반에 만나 10여 년 동안 500여 곡을 함께 만든 한국 가요계의 대표적 ‘작사-작곡가 콤비’다. ‘가슴 아프게’(남진) ‘공항의 이별’(문주란) ‘물레방아 도는데’(나훈아) ‘흑산도 아가씨’(이미자) ‘마포종점’(은방울 자매) 등의 히트곡이 두 사람의 작품이다.

정 씨는 15일 동아일보와의 통화에서 “거의 매일 밤샘 작업을 하면서 곡을 쏟아낸 것 같아요. 남진, 나훈아, 이미자 등 곡을 달라고 하는 인기 가수만 10여 명이 됐고 쉴 틈이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산 박 씨에 대해 “천재이자 음악과 결혼한 양반”이라고 말했다. 멋쟁이인 데다 예술인 특유의 성격이 있어서 자존심도 강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그래도 소위 (우리 두 사람이) 죽이 잘 맞았다”면서 “음악적 견해차 때문에 심하게 다퉈도 며칠 뒤 주변 지인들이 화해시키려고 만든 술자리에서 한 잔 같이하면 사이가 금세 풀렸다”고 떠올렸다.

그는 “선배님은 줄담배였다. 곡이 잘 써지면 잘 써진다고 담배를 피우고 안 풀리면 속상해서 담배를 물고 살았다. 그때 건강이 많이 상한 것 같다”고 말했다.

정 씨 외에도 박 씨와 작업을 함께한 작사가는 하중희(기러기아빠) 손로원(비내리는 호남선) 한운사(누가 이 사람을 모르시나요) 이경재 씨(섬마을 선생님) 등이지만 대부분 세상을 먼저 떠났다. 정 씨는 “한국의 걸출한 작곡가를 몇 꼽으라면 박 씨가 반드시 포함될 것”이라며 “이제 같이 작업을 할 수 없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지명길 한국대중문화예술연구원 회장은 “주위에서 선배님을 ‘부드러운 사람’으로만 생각하는데 사실 성격이 강직하고 굉장히 꼼꼼했다”고 말했다. 지 회장은 함께 노래를 만든 적은 없으나 1987∼89년 음악저작권협회 감사로 일하며 당시 회장이던 박 씨를 보좌했다. 지 회장은 “카리스마가 대단해서 후배들이 잘못하면 불러서 쥐어박기도 했다”면서 “하지만 많은 후배가 (선배님의) 인간적인 면을 보고 많이 따랐다”고 말했다. 박 씨는 1994년 투병 생활이 시작된 후 지인들의 병문안도 가급적 고사했다.

지 회장은 “평소 후배들에게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노력했는데 병석의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셨을 것”이라며 “음악적 재능뿐 아니라 평소 생활에서도 후배들의 모범이 된 선배님이었다”고 말했다.

한편 한국음악저작권협회는 이날 박 씨가 생전에 남긴 2700여 곡 가운데 협회에 등록된 1616곡의 저작권이 동생 금석 씨(78)에게 승계됐다고 밝혔다.

황인찬 기자 hic@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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