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915년 佛롤랑 바르트 출생

  • 입력 2008년 11월 12일 02시 56분


문학을 사랑하던 프랑수아 미테랑 프랑스 사회당 당수는 1980년 2월 점심 때 파리 시내에서 파티를 열었다. 대통령이 되기 바로 전 해였다.

이 파티에 참석했다가 집으로 걸어 돌아가던 백발의 남자가 에콜 거리의 차도에 발을 내딛는 순간 세탁소 트럭이 그를 덮쳤다. 병원에 옮겨지고 나서 한참 후에야 이 남자가 프랑스를 대표하는 문학 비평가 롤랑 바르트라는 사실이 확인됐다.

바르트는 1915년 11월 12일 노르망디 지방 셰르부르에서 태어났다. 해군 장교였던 아버지는 그가 첫돌을 맞기 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전사했다.

1924년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이사해 학교에 다녔다. 총명한 학생이었지만 19세 때 폐결핵에 걸려 13년간 학교와 요양원을 오가며 살았다. 1960년대 초까지 루마니아 이집트 등을 떠돌며 프랑스어 교사, 연구원 등으로 일하다 47세 때 고등사회과학원 연구원으로 처음 안정적인 일자리를 잡았다. 61세 때에 콜레주 드 프랑스의 기호학 교수가 됐다.

그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첫 번째 책인 ‘글쓰기의 영도’(1953년)는 장폴 사르트르가 주창한 실존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신화론’(1957년)에서는 구조주의자, 기호학자의 면모를 보였고 ‘기호의 제국’(1970년)에서는 구조주의를 해체하는 ‘탈구조주의’ 이론을 선보였다. 자신의 생각이나 이론이 일반에 받아들여질 만하면 다른 이론으로 옮겨간 그는 사상계의 아웃사이더였고 성적(性的)으로는 동성애자였다.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모를 만나면 부모를 죽여라”라는 중국 임제(臨濟) 선사의 화두를 연상시키는 삶. 탈출하려던 굴레가 윤회의 사슬이 아니라 글쓰기의 자유를 속박하는 부르주아적 체제와 질서라는 점만 달랐다.

바르트는 비평의 대상을 문학작품에서 사진 패션잡지 영화 등으로 계속 확장했다. ‘기호의 제국’에서는 일본 사회를 텍스트로 하는 파격적인 글쓰기를 선보였다. 일본을 여행하며 경험한 사회, 문화 현상들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읽고 묘사하며 성찰했다. “나는 여행객이나 방문객이 아니라 독자”라고 그는 썼다.

교통사고 후 한 달을 병원에서 투병하던 그는 1980년 3월 말 65세로 세상을 떴다. 장례식에는 친구 몇 명만 참석했다. 20여 일 뒤 75세의 사르트르가 숨졌을 때 5만 명 이상이 모인 것과 대조가 됐다.

“바르트의 ‘제자’는 없다. 작가들이 대개 그렇듯 오직 아류(亞流)만 있을 뿐”이라는 기호학자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얘기에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바르트의 정신세계는 누군가가 뒤따르기에는 너무 지적이고 변화무쌍했다. 그럼에도 그는 현대 비평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인물로 남아있다.

박중현 기자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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