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佛 피에르 상소가 본 세계인]"현대인 속도경쟁이 불행자초'

  • 입력 2003년 1월 29일 18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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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복 장미란 부부는 재미있게 산다. 지난해 초 파리에 나타난 40대 후반의 이 부부가 하는 일은 주로 읽고, 토론하고, 산책하고, 포도주 마시는 일이다. 부부 공저로 펴낸 책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는 파리로 ‘자발적 망명’을 택한 자신들의 ‘게으른 삶’에 대한 예고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정수복 장미란 부부는 재미있게 산다. 지난해 초 파리에 나타난 40대 후반의 이 부부가 하는 일은 주로 읽고, 토론하고, 산책하고, 포도주 마시는 일이다. 부부 공저로 펴낸 책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는 파리로 ‘자발적 망명’을 택한 자신들의 ‘게으른 삶’에 대한 예고편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파리=박제균특파원
《‘느림의 철학자’ 피에르 상소와의 만남은 그 과정부터가 ‘특별’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Du Bon Usage de la Lenteur)’로 한국에서 ‘느림의 삶’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킨 상소 박사는 프랑스 파리에서 남쪽으로 800여㎞ 떨어진 나르본이라는 소도시에 살고 있다. 그의 집 전화는 통화가 되지 않았다. 그는 휴대전화도 e메일 주소도 없었다. 전화 자동응답기에 녹음을 남겨 놓고, 그의 책을 펴낸 한국과 프랑스의 출판사에까지 도움을 청했으나 감감 무소식이었다. 접촉을 시도한 지 보름쯤 지났을까. 기자 집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돼 왔다. 나르본에서 보낸 상소씨의 편지였다. 거기에는 “기쁜 마음으로 대담에 응하겠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전화 한 통이면 될 일을 자필 편지로 응답한 것은 느림의 철학자다웠다. 꾹꾹 눌러 쓴 편지에서 묻어나는 진심을 느끼면서 기자는 그의 늦은 응답을 탓하지 못하고 ‘우리가 너무 빠르게 사는 것은 아닌가?’라는 의문에 빠져들기에 이르렀다.》

상소 박사와 마찬가지로 휴대전화와 e메일 주소가 없는 사회학자 정수복(鄭壽福)씨와 여성학자 장미란(張美蘭)씨 부부가 파리 소르본대학 인근의 작은 호텔에서 그를 만났다. 이 부부는 2001년 느림의 철학과 문명 전환을 주창한 책 ‘바다로 간 게으름뱅이’를 함께 펴낸 뒤 지난해 파리에 왔다. 느리게 사는 상소씨와 정씨 부부의 대화는 느리지만 편안하고 따뜻하게 이어졌다.

▽정수복=선생님과 마찬가지로 우리 부부도 책을 통해서 빠름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에서 역설적으로 느림이 갖는 가치를 주장했습니다.

▽상소=(웃으며) 그럼 경쟁자네요.

▽정=경쟁자라기보다는 느림의 가치를 실천하고 전파하는 협력자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책이 한국에서 반응이 좋은 이유를 어떻게 해석하십니까.

▽상소=한국사회가 속도를 강조하는 사회인 만큼, 많은 사람들이 이제는 조금 지쳤다는 사실의 입증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나의 글 쓰기 방식도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프랑스에서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어떻게 쓸 것인가를 별로 고민하지 않아요. 독자에게 직접적으로 무엇을 강요하지 않고 부드럽게 다가가는 글 쓰기가 중요하다고 봅니다.

▽장미란=나르본에서의 일상은 어떠세요.

▽상소=프랑스에는 나르본처럼 ‘잠자는’, 즉 변화가 없는 소도시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도시에서는 말 그대로 아주 편안히 잠잘 수가 있습니다. 내가 아무 하는 일없이 그저 걷거나 꿈꾸는 일을 할 수 있는 곳이 나르본입니다. 나르본 중심에 운하가 있는데 날씨가 좋으면 그리로 나갑니다. 요즘에는 오후에 누워서 책을 읽어요. 과거에는 기분전환을 하고 머리를 맑게 하기 위해서 커피를 마셨지만 이제는 커피 대신 30분 정도 낮잠을 잡니다. 자동차는 있지만 하루 10㎞ 이상은 달리지 않습니다. 더 달리면 내 차는 문제를 일으키거든요. 집에서 바다까지가 10㎞ 이내여서 바다를 보는 데는 지장이 없기 때문에 고치지 않고 쓰지요.

▽장=고령에도 건강을 유지하는 비결이 있나요(75세의 상소씨는 아직도 테니스를 즐긴다고 했다).

▽상소=매일 걷는 일이 중요합니다. 웃으며 살고 타인을 용서할 줄 아는 것, 다시 말해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아는 능력이 평화를 줍니다. 지나간 일을 후회하지 않습니다. 후회는 두 번의 실패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일이 잘못됐기 때문에 실패이고, 지금 후회하는 것이 두 번째 실패입니다. 무엇보다 자연과 친해져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장=파리 같은 큰 도시에 오시면 어떻습니까.

▽상소=파리는 세계 제1의 관광도시가 됐기 때문에 과거보다 관광버스와 확성기 소리가 많아지고 어수선해졌습니다. 그래도 길을 걷거나 공원을 산책하다보면 뭔가를 느낄 수 있는 도시입니다. 겨울 아침 눈 내린 뤽상부르 공원을 걸으면 이곳이 대도시라는 생각이 들지 않아요.

▽정=서울 같은 거대 도시에서도 ‘느림의 삶’이 가능할까요.

▽상소=그 대답은 서울시장이나 한국의 도시 담당 장관 같은 사람들이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웃음). =나는 거대 도시에서 느린 삶을 추구하는 데는 공원의 존재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합니다. 프랑스에서 공원은 하나의 ‘제도’입니다. 그것은 몽상을 위해 남겨진 장소지요. 파리의 도시계획위원회에서 내게 공원에 무엇을 설치하면 좋겠느냐고 조언을 구한 적이 있습니다. 나는 이것저것을 많이 설치하기보다는 빈 녹지 공간을 많이 그대로 놓아두는 것이 더 좋겠다고 했어요. 설사 커다란 공원이 아니더라도 꿈꿀 수 있는 작은 공간들이 필요합니다. 공원이 없으면 자기 집 한구석에 작은 정원이라도 만들거나 화분이라도 들여놓고 저녁마다 식물들을 들여다보는 시간을 가지는 게 좋습니다.

▽정=한국에서는 새해를 맞이하면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고 인사말을 합니다. 선생님께서 정의하는 복, 즉 행복은 무엇입니까.

▽상소=복을 외부에서 받는다는 생각이 서양적 사고하고는 다르군요. 서양에서 복은 자신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복을 ‘받는다’라는 표현은 인간의 오만을 버린 겸손함의 표시 같군요. 행복은 결코 물질적인 성취가 아닙니다. 물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물질적인 삶의 조건을 개선하는 것이 급선무겠지만, 근본적으로 행복이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것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자기 자신을 결점이 있으면 있는 대로 용납하고 받아들이는 것, 그래서 평화로운 마음의 상태에 이르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고 생각합니다.

▽정=선생님은 대학에서 철학 인류학 사회학 등을 가르쳤는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철학자, 지식인, 현자, 아니면 다른 어떤 것으로 정의하는지요.

▽상소=나는 나를 ‘모럴리스트’(Moralist)라 정의합니다. 모럴리스트는 언제나 자신을 더 완전한 상태로 만들어가기 위해 관찰하고 성찰하고 다듬어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어떤 평론가는 나를 보고 ‘집시 철학자’라고 부르지요. 어느 곳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사고하고 글 쓰는 것이 나의 취향입니다.

▽장=나는 느림의 가치를 교육에서 찾고 싶은데요. 한국은 사회 전체가 경쟁과 성공을 강조하다 보니까 어린 나이부터 아이들을 공부에 매진하도록 몰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자라난 아이들이 느림의 가치를 음미할 수 있는 성인으로 자라기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어떤 치유책이 있을까요.

▽상소=아이를 바쁘게 만드는 일은 효율성을 높일지 몰라도 아이로 하여금 항상 쫓기는 삶을 살게 할 것입니다. 아이가 혼자서 균형 잡힌 삶을 살 수 있는 소양을 어릴 때부터 키워주는 일이 중요합니다. 느림의 감수성은 엄마 품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어머니들이 아이를 재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느긋하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어머니들이 먼저 느림의 감수성을 회복하기 위한 내적인 혁명이 있어야 합니다.

▽정=경쟁과 정복을 강조하는 현대사회의 발전 모델은 남성적 모델입니다. 새로운 발전 모델은 여성적인 원리들, 나눔과 보살핌, 사랑과 부드러움, 관대함 등을 포함해야 한다고 보는데….

▽상소=정말 본질적인 얘깁니다. 그동안 서양의 발전 모델은 속도를 강조해 왔고, 그것이 전 세계로 전염병처럼 확산됐습니다. 한국도 그런 모델이 번진 나라 중의 하나입니다. 이제 남성적인 서양의 발전 모델은 위기에 처했습니다. 새로 낸 책 ‘너를 유혹하지 않으련다’에서 ‘부드러움’에 대해 다루었는데 서양적 발전 모델이 더 이상 부드러움과 느림이라는 여성적 가치를 억압해서는 안 됩니다.

▽정=동아일보 독자들에게 해 줄 말씀은….

▽상소=먼저 한국의 동아일보 독자들과 내가 쓴 책을 읽는 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현대 도시의 생활은 무조건 빨리 뛰라고만 강요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의 작은 경험이라도 천천히, 깊이 음미하면 더 큰 만족감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느림’이란 외부로부터 강요된 속도가 아니라 자신의 속도로 움직이는 것을 말합니다. (2시간여의 대담을 마친 상소 박사는 “한국을 가보고 싶지만 비행기를 타는 것이 힘들다”고 했다. 작별 인사를 하고 느릿느릿 걸어가는 노 철학자의 등 뒤로 부드러운 햇살이 쏟아졌다. 그 햇살은 은은히 주위로 번져나가는 듯 했다.)

진행·정리=박제균 파리특파원 phark@donga.com

▼피에르 상소는…▼

피에르 상소는 1928년 남프랑스의 작은 도시 앙티브에서 태어났다. 청소년 시절 한때 집시생활을 하다가 프랑스 인문계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파리고등사범학교와 소르본대에 들어가 철학을 공부한 뒤 그르노블과 몽펠리에대학에서 철학과 인류학을 가르쳤다.

퇴직 이후 남프랑스의 나르본에서 본격적으로 '느리게' 살면서 저술 활동을 해 온 그는 1977년 '도시의 시학' 이후 '감각적인 프랑스'(1985) '가난한 사람들'(1992) 등 15권의 책을 냈다. 그 가운데 1998년 작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로 널리 알려졌다.

프랑스의 대표적 지성의 한 사람인 피에르 부르디외가 프랑스 사회의 불평등에서 분노의 원천을 찾아내는 비판적 태도로 일관했다면 상소는 부드러운 눈으로 프랑스의 색깔과 향기, 그리고 행복을 추구한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진행·정리=박제균 파리특파원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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