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재미교포 프리랜서 사진작가 김영희씨

  • 입력 1999년 5월 30일 19시 18분


미국의 권위있는 언론평론지 ‘아메리칸 저널리즘 리뷰’는 지난해 1,2월호에서 남성의 오랜 독무대였던 포토저널리즘에 우먼 파워가 거세게 불어닥치고 있다면서 재미교포 김영희씨(36)를 대표적 인물로 소개했다.

김씨는 97년 사진기자들에게는 퓰리처상보다 더 권위가 있는 ‘올해의 사진상(POY)’을 수상한 것을 시작으로 국제보도사진전에서 ‘골든아이(황금의 눈)상’ ‘해외취재보도상’ 등 주요한 상을 휩쓸었다.

김씨의 ‘연승(連勝)’이 올해 재연되고 있다. 3월 국제보도사진전 일반뉴스 부문에서 1위를 차지한 김씨는 8일에는 백악관 사진기자협회가 선정하는 사진전에서 국제보도 특집 픽처스토리 등 3개부문을 휩쓸었다.

수상소식이 전해진 직후 김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E메일을 띄웠다. “마케도니아에서 취재중이기 때문에 인터뷰가 어렵다”는 답장이 왔다. 국제분쟁 전문기자가 코소보사태를 외면할 리가 없었던 것.

28일 워싱턴으로 돌아온 그를 만났다.

―코소보사태의 현장은 어떠했는가.

“미움의광란이었다. 공산주의 몰락, 경제토대의붕괴, 바깥세계로부터의고립이민족주의적 증오를불러일으키고있었다. ‘쉰들러 리스트’의재현을 보는 것 같았다.”

프리랜서로 활동하고 있는 김씨는 92년 소말리아 내전 취재도중 숙소를 덮친 반군에 체포돼 유엔의 중재로 4일만에 풀려난 적도 있다.

이후에도 르완다내전과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선거를 취재했으며 지난해에는 인도네시아의 약탈 방화 현장을 누볐다.

김씨는 ‘강철같은 신경줄과 여성의 섬세한 감각이 결합된 기자’라는 평을 듣고 있다.

―여성으로서 분쟁 취재가 위험하지 않은가.

“위험에 부닥치면 여성과 남성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 위험을 자초하는가.

“국제분쟁은 가장 인도주의적 관심이 요구되는 역사의 현장이다. 사진은 그같은 관심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고 포착할 수 있는 무기다. 그래서 현장에 뛰어든다.”

대구에서 출생해 열살 때 의사인 어머니를 따라 미국에 온 김씨의 영어에는 아직도 경상도 억양이 배어있다.

―사진을 선택한 이유는….

“언어에 소질이 없어 영어 배우기가어려웠다. 말을 대신할 수 있는 카메라에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남성이 주류를 이루고 있는 사진 세계에서 성공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인가.

“사진은보수가 높은 분야는 아니다. 성공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똑같이 현장에 있어도 다른 사진이 나온다. 얼마나 자신의 아이디어를 갖고 찍느냐가 중요하다. 사전에 정보를 수집하고 사건의 맥락을 짚어두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프리랜서지만 주요언론사들과 계약을 하고 일에 착수한다. 마케도니아에는 시사주간지 유에스뉴스 앤드 월드리포트지와 독점계약을 하고 다녀왔다.

그러나 계약을 하지 않아도, 휴가때나 휴일에도 세계 어디로든 달려간다. 97년 ‘올해의 사진상’에 포함된 위안부 할머니 사진은 무보수로 틈틈이 취재한 결과다. 물론 한국에 대한 관심과 애정도 담겨 있다.

그는 인터뷰 말미에 일침을 놓았다.

“한국에 가면 항상 내가 여자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미국에서는 그렇지 않다. 내가 한국에 그대로 있었다면 지금쯤 주부로 평범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김씨는 여성 사진기자로서는 드물게 결혼을 했다. 다만 아이를 갖지 않았다.

〈워싱턴〓홍은택특파원〉eunta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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