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갈피 속의 오늘]1633년 갈릴레이 ‘이단’ 심문

  • 입력 2006년 4월 12일 03시 0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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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종교재판 법정을 나서며 했다는 이 말은 권력에 맞선 과학자의 신념을 대변하는 격언으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갈릴레이는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이 격언은 그가 죽은 뒤 초상화 밑에 새겨진 문구가 후세에 미화된 것이다.

반면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희곡 ‘갈릴레이의 생애’에서 갈릴레이는 고문도구를 보고 겁이 나 신념을 철회한, 학문의 대열에서 용납할 수 없는 비겁자로 그려진다.

그러나 이 역시 사실과 거리가 멀다. 종교재판 후 갈릴레이는 죽을 때까지 9년간 가택연금 상태에서 시력을 잃어가면서도 근대 물리학의 씨앗인 ‘새로운 두 과학’을 저술했다.

후세 사가들이 밝혀낸 갈릴레이는 영웅도, 비겁자도 아니었다. 서슬 퍼런 검열 정책을 폈던 종교 권력과 타협해 가며 자신의 신념을 펴기에 적당한 기회를 끊임없이 모색했던 인물이었을 뿐이다.

지구를 우주의 중심으로 바라보던 시대에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지만 1616년 교회의 경고를 받고 더는 지동설을 논하지 않겠다고 서약한다.

침묵의 세월을 보내던 갈릴레이에게 서광이 비친 것은 1623년 그에게 우호적인 교황 우르반 8세가 즉위한 뒤였다. 교황으로부터 천동설과 지동설을 비교하는 책을 써도 좋다는 허락을 받은 갈릴레이는 1632년 ‘프톨레마이오스-코페르니쿠스 두 개의 주요 우주 체계에 대한 대화’라는 긴 제목의 책을 펴냈다.

여느 학술서와 달리 이 책은 큰 인기를 끌었지만 역공도 강했다. 누가 봐도 결론은 지동설을 옹호하는 쪽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책은 금서가 되고 이듬해인 1633년 갈릴레이는 종교재판에 회부되고 만다.

4월 12일 로마에서 수석 심문관 피렌주올라 신부에 의해 갈릴레이의 이단 심문이 시작됐다. 갈릴레이는 이번에도 자신의 위법행위를 인정했다.

6월 22일 내려진 종교재판의 판결은 가혹했다. 가택연금뿐만 아니라 사후 장례를 치르거나 묘비를 세우는 일조차 허용되지 않았다. 로마교황청이 갈릴레이에게서 ‘이단’의 낙인을 지운 건 종교재판 이후 360여 년이 지난 2003년에 이르러서였다.

김희경 기자 susann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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