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복을 빕니다]‘성문영어’ 시리즈 저자 송성문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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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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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90년대 휩쓴 ‘영어의 바이블’
국보급 고서 수집… 모두 정부에 기증

‘성문영어’는 1970∼90년대 수험생에게 필독서였다. 성문 기본·핵심·종합영어 시리즈는 1967년 초판이 나온 후 현재까지 40여 년간 꾸준히 팔린 스테디셀러다. 한때는 연간 30만 부 이상 팔린 초(超)베스트셀러였다. 가히 ‘영어의 바이블’이라 불릴 만하다.

바로 이 성문영어 시리즈의 저자 송성문 씨(본명 송석문·사진)가 22일 오후 4시 반경 별세한 사실이 23일 알려졌다. 향년 80세. 남들에게 알리지 말고 가족끼리 조용히 장례식을 치르라는 고인의 뜻 때문이었다. 고인은 조의금, 화환을 받으며 다른 사람에게 폐를 끼치지 말라고도 했다. 발인은 24일 오전 6시며 장지는 경기 파주시 동화경모공원이다.

평안북도 정주 출신으로 신의주교원대를 나온 그는 6·25전쟁 당시 미군 통역장교로 근무하다 월남했다. 이후 영어 검정고시 중등·고등과정에 합격했고 부산 동아대를 졸업했다. 부산고와 마산고, 서울고 등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변변한 영어 교재 하나 없던 1960년대 중반이었다. 그가 잘 가르친다는 소문이 퍼졌다. 성문각 출판사로부터 ‘제대로 된 참고서’를 만들어보자는 제안이 들어왔다. 출판사는 집 한 채 가격에 맞먹는 200만 원의 원고료와 1년의 집필기간이란 파격적 조건을 제시했다. 좋은 참고서가 절실하던 때가 아닌가.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1967년 3월 출판된 ‘정통종합영어’는 나오자마자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다. 1년간 1만5000부가 팔렸다.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대박’이었다. 딱딱한 기존 참고서와 달리 예문이 생생하게 살아있었던 게 인기 비결이었다.

그의 인생은 검소했다. 큰돈을 벌었지만 재산이라고는 가족과 함께 살던 아파트 한 채와 5층짜리 출판사 건물뿐이었다. 그 대신 벌어들인 돈을 국보, 특히 고서(古書)를 수집하는 데 썼다. 성문시리즈를 만든 것은 아이들 공부에 도움을 주기 위해서지, 돈을 벌기 위한 게 아니라는 철학 때문이었다.

성문영어 시리즈의 저자 송성문 씨가 2003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 동아일보DB
성문영어 시리즈의 저자 송성문 씨가 2003년 3월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한 문화재. 동아일보DB
수집한 국보급 문화재는 고스란히 나라에 바쳤다. 2003년 그는 국보(國寶) 236호 ‘대보적경’, 271호 ‘초조본현양성교론’ 등 국보 2점, 보물(寶物) 1081호 ‘묘법연화경’ 등 보물 22점 등 총 27점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이때도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선행이 알려지는 것을 꺼렸다. 박물관에 전화를 걸어 “집에 와서 유물을 가져가라”고 통보한 뒤 자신은 미국에 사는 아들집으로 ‘피신’한 것은 유명한 이야기다. 정부는 그의 공을 인정해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했다.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한 것은 2003년 무렵으로 간암 판정을 받았다. 그것도 6개월 시한부라는 선고였다. 그때부터 외부에 거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미국으로 잠적한 것 아니냐는 소문이 돌았다.

예상을 깨고 8년간 병과 싸웠다. 재기하는 듯했다. 그 기간에도 영어 참고서 3권을 썼고 수석(壽石) 관련 책을 내는 등 그의 열정은 꺼지지 않았다. 그러나 끝내 병을 이기지는 못했다. 그를 추모하는 마음이 인터넷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경희 기자 sorimoa@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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