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천재 이창호 ①]반집도 꿰뚫는 「반상의 神算」

  • 입력 1998년 6월 1일 07시 29분


《세상의 모든 ‘바둑’이 이창호(李昌鎬·23)를 바라보고 있다. 16세 6개월 때 최연소의 나이로 세계 정상에 오른 프로 바둑기사 이창호. 그는 7년째 세계 정상을 지키며 아직도 굳건하게 건재한다. 건재할 뿐만 아니라 나날이 기력(棋力)이 뻗어가고 있다. ‘안개 덮인 태산(泰山)’ ‘사람의 모습을 한 바둑의 신’ ‘바둑의 천재(天才)―귀재(鬼才)―신산(神算)’ ‘돌부처’ 등등. 그에 대해 쏟아진 찬사들이다. 그는 과연 누구인가. 이창호의 모든 것을 10회에 걸쳐 연재한다.》

60년대 중반 이후 국수위를 7연패한 ‘영원한 국수’ 김인(金寅·55)9단. 작년 겨울 어느날 오후 김9단은 서울 성동구 홍익동 한국기원 부근의 한 음식점에서 술을 마셨다. 그날 오전 이창호가 ‘올해의 최우수기사’로 선정된 것을 축하할 겸 회식이 있었다. 다들 떠난 자리를 지키며 그는 자작을 했다. 허탈한 독백과 함께 그는 술을 마시지 않을 수 없었다.

“벌써 몇년째인가. 창호를 상대할 자가 정말 아무도 없다는 건가. 왜들 그렇게 창호를 두려워하지. 대체, 뭐가 두렵다는 거야.”

술에 얼큰해진 그는 택시를 타고 한국기원이 있던 서울 종로구 관철동을 지났다. 바둑이 있었기에 누렸던 ‘국수(國手)’의 영광(榮光).

“이창호는 나에게 무엇인가, 아니 프로기사 모두에게 그는 무엇인가.”

바둑과 40년 세월을 함께 한 노기객(老棋客)은 청년 이창호의 엄청난 무게를 절감했다.

이창호는 정말로 강한가. 순하기만 한 얼굴, 유약한 손길이 그렇게도 센가. 바둑계의 ‘이창호 신화’는 과연 무엇인가.

71년 ‘국수’를 지낸 프로기사 윤기현(尹奇鉉)9단은 ‘이창호 신앙’을 즐겨 이야기한다. 올해 4월 일본 도쿄에서 열린 후지쓰(富士通)배 16강전때 그 믿음은 더 깊어졌다.

한국대표 일원으로 출전한 이창호는 여유있게 상대를 물리치고 다른 바둑을 구경하러 나타났다. 일본기원 관계자가 때를 놓칠세라 공개해설장으로 안내해 ‘누가 유리한가’를 정중히 물었다.

잠시 판을 훑어본 이창호는 특유의 어눌(語訥)한 어투로 말했다.

“글쎄요…. 어려운데요. 백이 반집쯤 나아 보이지만….”

그 뒤 바둑은 1백여 수가 더 진행돼 끝났고 결과는 백의 반집승. 해설자가 ‘이창호선생이 한 말 그대로’임을 알리자 장내는 ‘아’하는 탄성과 함께 요란한 박수로 뒤덮였다. 현대바둑의 선진국이란 자존심으로 한국의 ‘국수’ 이창호를 그저 ‘괴물’이라 부르던일본인들이이제 ‘선생’이라부른다.

“계가(計家)라면 저도 둘째 정도는 가지요, 창호 다음으로…. 하지만 반집 승부는 못 맞춰요. 하물며 1백수나 남겨두고…. 절대 안됩니다.”

‘국수’ 윤9단이 ‘불가능’이라고 단언하는 아득한 경지에서 이창호는 유유자적한다. 그래서 신산(神算)이고 프로기사들도 모두들 두려워 하는 존재이다.

‘국수’였던 김인 9단과 윤기현 9단은 물론, 국내외 프로기사들은 한결같이 이창호의 바둑, 아니 이창호 자체가 갖는 불가사의함에 고개를 내젓는다. 90년 중학교 3년생으로 ‘불세출의 천재기사’이자 스승인 조훈현(曺薰鉉)을 꺾고 ‘국수’를 차지한 이후 국내 기전 정상권에서 멀어진 적이 한번도 없다. 92년 16세6개월때 동양증권배 세계대회에서 프로바둑계의 거봉(巨峰) 린하이펑(林海峰)을 넘고 세계최연소 챔피언이 됐다. 기네스북에도 올랐다.

현재 그는 국수 기성 대왕 배달왕 동양증권배 등 국내외 기전 12개의 타이틀을 갖고 있는 세계 최강자. 6월1일 현재까지 프로 통산 전적 811승 209패로 승률 약 80%.

왜 졌느냐고 묻지 말자. 타이틀 보유자인 그와 대국하려면 예선과 본선을 거치며 수많은 고비를 넘겨야 한다. 보통 기사에게는 승부를 떠나 이창호와의 대국 자체가 영광인 현실이다. 최정상급을 상대한 승부가 대부분인지라 완승은 없다.

중국의 프로기사이자 바둑칼럼니스트로 이름을 날렸던 자오즈윈(趙之雲·7단·95년 작고)은 이창호의 바둑을 일컬어 ‘안개 덮인 태산’이라 했다. 거대한 형체는 분명 있는데 누구도 쉽게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어떤 세계. 만나 본 적도 없는 이창호의 바둑 속에서 ‘전혀 딴 세상’을 발견하고 찬탄과 경외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창호는 대국중 가끔 프로기사들도 예상치 못한 수를 던지곤 한다. 마치 천하의 고수를 실험이라도 해보려는 듯. 상대는 경악과 혼란 속에서 자멸한다. 다들 놀랐던 수를 던진 이유에 대해 그는 국후 “바둑이 좀 불리한 것 같아서…”라는 식으로 슬며시 넘어간다.

1백수를 남겨놓고 반집 승부까지 읽어내는 놀라운 계가 실력이 있기에 그는 일찍부터 승부수를 던지는 것이다. 반면이 유리한 것으로 본 상대는 거기에 여지없이 걸려들며 ‘안개 덮인 태산’에 갇힌다.

〈조헌주기자〉hanscho@donga.com

▼ 이창호 연보

75.7 전북 전주 출생

82.3 전주교대부속초등학교 입학

83.1 8세때 조부 이화춘씨한테 바둑을 처음 배움

83.6 전영선프로6단의 지도를 받음

84.2 입문 1년만에 어깨동무 바둑왕전 결승에서 류시훈을 꺾고 우승

4 조훈현9단과 만남. 2점을 깔고 둔 시험기에서 짐

9 서울 이대부속초등학교로 전학 조훈현9단 내제자로 들어감

86.7 바둑 입문 3년후, 초등학교 5년때 프로 입단

88.3 충암중 입학

89.8 바둑왕전 우승(14세1개월. 최연소 타이틀 획득)

90.8 41연승 신기록

10 스승 조훈현9단을 꺾고 국수전 우승

91.3 충암고 입학

92.1 동양증권배 우승(16세6개월. 최연소 세계챔피언)

94. 국내 16개 기전에서 한번 이상 우승하는 ‘사이클링 히트’달성

96.8 후지쓰배 우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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