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홍 칼럼]총선 본질 일깨운 ‘親조국 세력’, 文도 ‘효자’로 생각하나

  • 동아일보
  • 입력 2020년 4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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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로 총선 본질 가려질 위기에 좀비처럼 등장한 ‘조국 추종 세력’
조국 對 윤석열, 특권·반칙 對 공정
文정책 방향 추인이냐, 제동이냐 결정할 定礎선거의 의미 일깨워줘

이기홍 논설실장
이기홍 논설실장
산 아랫마을에 여러 농장이 있다. 기후가 좋아 대부분 농장이 풍년인데, 한 농장만 최악의 흉작이다. 새 농장주가 새로운 농경법을 밀어붙인 결과다. 토양에 안 맞는 시대착오적인 농경법이라는 충고가 빗발쳤지만 농장주는 쇠고집이었다. 두고 보라고, 추수 때가 되면 내 방법이 옳았음이 증명될 것이라는 낙관론만 되풀이했다

그런데 추수 직전 산사태가 덮쳤다. 모든 농장이 다 묻혀버렸다. 작황 비교가 어려워진 것이다. 농장주는 낙제점이 분명했을 성적표가 산사태에 묻혀 무(無)채점으로 넘어가는 행운을 기대하게 됐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오묘하다. 산사태 상황을 유리하게 이용하기 위한 전략을 아무리 세밀히 세워도 예상 밖 변수가 등장하게 마련이다. 자기 편 내부의 오버하는 인간들, 과잉 충성파 등등이 돌출해 상황이 엉뚱한 방향으로 튀기 일쑤다.

더불어민주당에서 떨어져 나온 정봉주 손혜원 김의겸 등이 모인 ‘열린민주당’은 집권세력의 당초 시나리오엔 없었을 거다.

이들 조국 추종세력은 ‘팬덤’에 바탕을 둔 친문의 특질을 재확인시켜줌과 동시에 국민들에게 코로나19 사태에 묻혀버릴 뻔했던 총선의 본질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즉 이번 총선이 조국을 살리고 윤석열을 쳐내는, 그래서 조국 세력 부활의 문을 열어주는 선거가 될 수도 있음을 일깨워줬다.

내 한 표에 따라 울산시장 선거 개입, 유재수 감찰 무마 등 권력 핵심부 의혹 사건의 진실 규명이 불가능해질 수도 있음을 깨닫게 해줬다. 조국 맹종 세력이 의도하지 않았을 아이로니컬한 결과다.

이들이 선거에 등장하면서 내건 일성(一聲)은 공수처를 동원한 윤석열 처벌이었다. ‘조국 수호’ 집회를 주도한 개싸움국민운동본부를 토대로 민주당 등이 결성한 더불어시민당은 전 국민 매월 60만 원 지급, 상장기업 시가총액 1% 환수 등을 공약으로 내걸었다. 곧 철회하기는 했지만 친문세력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인지, 이들이 원하는 사회가 어떤 건지를 보여준다.

문제가 된 공약을 철회하고 잠시 온건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중도층을 쫓아내는 부작용을 걱정해서일 뿐 생각이 바뀐 것은 아닐 것이다. 보통 시민이 일상생활에서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다. 그렇게 극단적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집권세력 지지층의 핵심에 있으며, 누더기 선거법이 그런 세력의 의회 진출의 길을 열어준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나 민주당은 이들이 정말로 못마땅할까.

여야 거대 정당은 선거 때면 중도층 획득을 중심에 두고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 결과 ‘온건 노선’에 실망한 강경 지지층의 투표율이 낮아지는 손해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친조국 세력의 선거판 등장은 투표 의욕을 잃었던 강경 지지층을 투표장으로 끌어들이는 효과를 낼 수 있다. 어차피 나중엔 다 한편이 될 세력이다. 모당(母黨)은 상대적 온건 이미지로 중도를 잠식하고, 강경파 위성정당은 왼쪽 끝 세력의 투표율을 높여 범여당의 파이가 커지는 꿩 먹고 알 먹기다.

단, 여당은 친조국 세력이 너무 목소리가 커져서 ‘조국 프레임’이 형성되는 것은 원치 않기 때문에 일정한 거리 두기를 한다. 손혜원의 ‘효자론’에 “그런 자식 둔 적 없다”식으로 까칠하게 대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가진 자’ 대(對) ‘덜 가진 자’의 대립 구도를 통치의 핵심 전술로 삼으면서 중도층을 포섭하려는 집권세력의 전략은 긴급재난지원금 대상을 ‘소득하위 70%’로 넓힌 결정에도 관철됐다.

자기 목소리를 내는 경우가 별로 없던 경제부총리가 기록으로라도 남겨달라고 할 정도로 반대했는데도 집권세력이 7대 3 분할을 고집한 것은 경제·사회 정책마저 전술전략으로 다루는 ‘기술자들의 분할 통치 감각’을 보여준다. 국민 30%에게만 지급한다면, 혹은 국민을 5대 5로 나눴다면, 또는 모두에게 지급한다면 도저히 끌어낼 수 없었을, 과반수를 내편으로 끌어당기고, 소수의 ‘가진자’를 고립시키려는 전략이다.

좀비처럼 부활한 조국 세력의 국회 진입 시도는 특정 정당 유불리를 떠나 우리 사회의 가치체계를 훼손시킨다. 공정과 정의의 가치를 정면으로 배반한 특권과 반칙 세력의 부활 움직임에 진보 인사들 사이에서도 혼란스럽다는 의견이 나온다,

문 대통령은 조국 세력의 부활 기도에 대해 어떤 생각일까. 선거전략상 중도층을 겨냥해 거리를 두고 있지만 속마음은 그들의 편인 것은 아닌지, 인간적 안타까움과는 별개로 조국 일가의 반칙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지….

현직 검찰총장을 단죄하겠다고 공언하는, 공수처라는 신생 국가기관을 자신들의 사병(私兵) 정도로 여기는 사람들을 청와대와 법무부의 핵심 요직에 두고 있었던 문 대통령의 생각도 그들과 같은 것인지 국민은 투표 전에 알 권리가 있다.

소득주도성장이 옳았다고 여전히 믿고 있으며 앞으로 더욱 가속 페달을 밟을 것인지, 아니면 정책 기조를 전환할 것인지, 친중·남북관계 최우선 노선을 지속할 건지…. 국가 진로를 선택하는 중차대한 정초(定礎) 선거에서 국민들이 코로나 착시 없이 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그래야 선거 후 민의 왜곡 혼란과 소모적 갈등이 줄어든다.

이기홍 논설실장 sechepa@donga.com
#21대 총선#조국 추종 세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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