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 청년이 쓴 북녘 설날 “줄당콩 반으로 갈라 윷놀이”

  • 신동아
  • 입력 2020년 1월 25일 16시 2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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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날은 음력설보다 양력설
● 열두 달 달력 1장에 적은 연력 사용
● 달력은 최고의 명절 선물
● 북녘의 한 해는 연날리기로 시작
● 설날 음식은 만둣국


1월 1일 새해맞이 민속놀이를 하는 평양시민들. [뉴시스]
1월 1일 새해맞이 민속놀이를 하는 평양시민들. [뉴시스]

해마다 이맘때면, 나는 연 띄우는 꿈을 꾸곤 한다. 꿈속 내 자아에는 천진난만한 10대의 ‘나’와 탈북을 꿈꾸던 20대 시절의 ‘나’, 한국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30대의 ‘나’가 모두 투영돼 있다. 설날을 기다리는 10대의 ‘나’는 여전히 연살로 쓸 수숫대와 든든한 연실을 장만하기에 바쁜 개구쟁이다. 20대의 ‘나’는 연을 날리면서도 탈북에 대해서만 생각한다. 나는 분명 탈북에 성공했는데 20대의 나는 왜 아직도 북녘에 있는 걸까. 그러면서 ‘내가 연이라면 쉽게 탈북할 수 있을 텐데…’ 생각한다. 30대의 나는 어른답게 위로하는 역할을 맡는다. 서로 다른 시간에 있는 나의 두 자아에 이렇게 말한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이건 꿈이어서 괜찮아. 너는 꿈을 이루었고, 이젠 안전해.”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도 30대의 나조차 혹시 이게 꿈이 아니면 어쩌지 하는 불안에 종종 시달린다. 나의 세 자아는 꿈속에서 각자의 역할을 수행하면서도 서로에게 중첩되고 간섭한다. 예를 들면, 10대의 내가 남쪽으로 날려 보낸 연을 찾아 30대의 내가 강원도의 어느 산기슭을 헤매기도 하고, 20대의 내가 10대의 나에게 연을 만들 수 있는 큰 창호지를 마련해 주기도 하는 식이다. 꿈속에서 나의 세 자아는 연을 통해 이어져 있다.

꿈을 깬 후 내게 남는 것이 꼭 서글픔뿐만은 아니다. 아련한 옛 시절의 추억 또한 내 이부자리에 머문다. 반쯤 잠에 취해 그 시절의 추억에 잠겨 있노라면, 입꼬리가 어느새 슬그머니 치켜 올라간다. 이제 그 시절 설날의 추억 속으로 여러분을 초대해 보려고 한다.

2003년부터 공식적으로 음력설 쇠

시작하기에 앞서 내 추억 속 설날은 신정(양력 1월 1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해둬야 할 것 같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북한에서 음력설은 생소한 명절이었다. 오랜 세월 전통 명절이던 음력설은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의 일환으로 1910년 이후 점차 사라져갔다. 광복 후 북한에서 음력설은 ‘봉건 잔재 타파’의 서슬 밑에서 부활하지 못했다.

1980년대 ‘조선민족제일주의’ 구호 아래 민족문화 전통을 고수하고 발전시키려는 시도가 일어나면서 음력설과 추석을 비롯한 민속명절이 재등장했다. 양력설에 익숙하던 주민들은 생소한 규정에 쉽게 적응하지 못했다. 2003년 북한 당국은 신정을 구정으로 ‘대체할 데’ 대한 지시를 내렸고, 양력설에 진행되던 국가 행사를 음력설에 맞춰 재편성했다. 설날 차례도 구정에 맞춰 지내도록 지시가 내려왔다. 이전에 3일 동안 휴식하던 양력설을 하루만 쉬게 하고 음력설을 3일간 쉬도록 했다. 구정이라는 명칭도 설명절로 바꿔 부르도록 했다.

나는 바뀌어버린 설날이 혼란스러웠다. 15세 소년에게 당시의 조치는 90여 년 전 일제의 민족문화 말살 정책과 별다를 게 없는 폭력이었다. 우리 가족은 양력설을 고수하기로 합의했다. 적어도 차례는 꼭 양력설에 지내자고 다짐했다. 조상님들이 제삿날 바뀐 줄 모르고 제사상 받으러 왔다가 그냥 돌아가면 그런 불효가 또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 아버지의 논리였다. 그 얘기를 듣고 있던 나는 좀 무서웠다. 장손인 나는 결심했다, 앞으로 영원히 양력설만 인정할 것이라고. 오랫동안 양력설을 설날로 쇠왔기 때문에 북한에서는 지금도도 양력설에 차례를 지내는 이가 더 많다.

달력은 최고의 명절 선물
2020년 북한 달력.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이 북한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1월 25일은 설 명절, 4월 15일은 태양절이라고 적혀 있다. [박해윤 기자]
2020년 북한 달력.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이 북한에서 가장 큰 명절이다. 1월 25일은 설 명절, 4월 15일은 태양절이라고 적혀 있다. [박해윤 기자]

어릴 적 나의 설 준비는 유난히 일찍 시작됐다. 마을 밖 수수밭에 탐스러운 수수이삭이 익어가고 수수밭 주인아저씨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를 때가 설 준비를 시작하는 타이밍이다. 우선 아저씨에게 큰 연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긴 수숫대를 부탁해야 한다. 마음씨 좋은 아저씨는 추수가 끝나면 제일 길고 튼튼한 수숫대를 이삭 바로 밑까지 바싹 잘라서 한 묶음씩 가져다주곤 했다.

연을 만들기 위해서는 큼직한 종이가 필요하다. 그 시절 내가 구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종이는 ‘연력’이다. 연력은 열두 달 달력을 종이 한 장에 적은 것이다. 물자가 귀하다 보니 북한에서는 지금도 달력을 쓰는 가정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달력은 최고의 명절 선물이기도 하다. 고위 간부들에게는 김일성 교시, 김정일 말씀 같은 게 날마다 적힌 일력을 당에서 제공한다.

해마다 새해가 오면 인민반을 통해 국가에서 세대별로 연력을 한 장씩 공급한다. 연력은 가로 50㎝, 세로 70㎝로 연을 만들기에 제격이다. 앞면에는 해당 연도의 연력과 체제 선전 사진이 인쇄돼 있으나 뒷면은 백지다. 설날까지 열흘쯤 남으면 부모님께 연력을 써도 되냐고 묻기를 반복했다. 마침내 부모님이 허락하면 연 만들기가 시작된다. 종이 중심부에 적당한 크기의 구멍을 내고 잘 말린 수숫대를 쪼개서 만든 연살을 붙이고 네 모서리에 조·국·통·일이라고 큼직하게 써넣는다. 이 모든 작업은 신중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쓸 수 있는 종이가 단 한 장밖에 없기에 연 만들기를 망치면 한 해를 망치는 것과 같았다. 다 쓴 공책 서너 장을 바르게 잘라 연의 몸통에 붙이면 꼬리까지 완성이다. 낚싯줄을 풀어 얼레에 감고 연과 연결하면 준비가 끝난다. 아직까지 마음을 놓을 수는 없다. 시험비행이 남아 있다.

북녘의 한 해는 연날리기로 시작
북한의 설날 연날리기. [북조선 녀성 페이스북]
북한의 설날 연날리기. [북조선 녀성 페이스북]

시험비행은 보통 학교 운동장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다. 연의 균형과 안정감 정도만 확인하고는 바로 끝낸다. 동생이 좀 더 날리자고 아무리 떼를 써도 어림없다. 설날을 위해서 참아야 한다. 북한의 한 해는 연날리기로 시작된다.

‘까치설날’은 설레는 날이면서도 고역(苦役)이다. 설음식을 만드는 어머니를 도와 잔심부름을 하고, 설날에 입을 옷도 손질해 둬야 한다. 윷놀이 판에 한 해 동안 쌓인 먼지를 닦아내고 새로운 윷을 준비하는 일도 내 몫이다. 제일 어려운 것은 밤 12시까지 잠을 참는 것이었다. 그 시절 나는 초저녁잠이 많았다. 전기가 공급되는 날에는 그나마 좀 괜찮았지만 ‘전깃불’이 없는 겨울밤에 자정까지 기다리는 것은 곤혹스러운 일이었다. 어린 마음에 눈썹이 하얘지기는 싫었다. 어른들은 설날을 맞이하기 전 잠들면 눈썹이 하얗게 된다고 말했다. 나중에야 어른들이 떡가루(떡을 만들기 위해 곡식을 빻은 가루)를 아이들의 눈썹에 발라놓는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무슨 할 음식이 그렇게 많으신지 밤을 새셨다. 아버지가 장남이어서 차례 음식 장만이 설 준비에서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제사 음식을 만드는 것은 아주 까다로운 일이다. 당시에는 돌이 섞이거나 껍질이 채 벗겨지지 않은 쌀이 많았다. 나와 동생이 쌀에서 불순물을 골라냈는데도 어머니가 쌀 함박으로 수차례 불순물을 걸러내야 했다. 아버지에 따르면 차례나 제사 음식을 만드는 도중에 맛을 봐서는 절대로 안 된다. 조상님이 맛보기 전에 먼저 음식을 먹는 것은 예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조상님께 드릴 음식을 만드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어린 마음에 느낀 그 감정을 아직도 나는 형용하지 못하겠다.

설날 아침 제일 먼저 하는 의식은 차례다. 오전 5시 이전에 차례를 지냈는데, 동생은 늘 잠에서 채 깨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절을 하곤 했다. 다른 집 조상님들보다 일찍 식사 대접을 해야 한다는 게 아버지가 이른 시각을 고집하는 이유였다. 나 또한 장남이었기에 제사상차림을 항상 집중해서 관찰했다. 아버지는 홍동백서, 좌포우혜, 어동육서, 반서갱동을 읊으면서 상차림의 예들을 외우시곤 했다.

상차림과 차례 진행은 규칙도 많지만 순서도 복잡하다. 아버지는 늘 순서를 헛갈리셨는데, 그때마다 나는 아버지가 이전에 했던 순서를 알려드려야 했다. 그런 일이 반복되면서 아버지는 순서가 헛갈릴 때마다 으레 내 쪽을 넌지시 바라보시곤 하셨고 나는 속으로 으쓱해지곤 했다. 올해 설에도 아버지는 어김없이 순서를 헛갈리고 계실 텐데 누가 그걸 바로잡아 주고 있을까.

설날 음식은 만둣국

차례를 지낼 때는 대문과 출입문을 조금씩 열어놓아야 하는데 그 사이로 조상님이 들어오시기 때문이랬다. 문 여는 일은 항상 내 담당이었다. 대문에서부터 출입문까지 거리는 5m 정도인데 어둠 속에서 지나는 그 5m는 나에게 형언할 수 없는 기대감과 두려움을 주었다. 기대감은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혹시나 다시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데서 오는 것이었고, 두려움은 이미 죽은 사람과 어둠 속에서 함께 걷는다는 섬뜩함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늘 궁금했다. 얼마나 많은 조상님이 오는지, 온다면 친가에서 올지 외가에서 올지. 나는 내가 친숙한 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오길 바랐지만, 그때마다 친할머니와 외할아버지는 어쩌지 하는 걱정이 함께 들었다. 나는 대문을 여는 순간 휙 하고 들어오는 바람 속에서 어떤 때는 할아버지의 마라초(종이로 말아 만든 작은 담배) 냄새를 맡을 수 있었고, 어떤 때에는 내 귀에 대고 소곤소곤 옛말 이야기를 들려주던 외할머니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부모님께 말씀드리지 않았다.

차례가 끝난 후에는 형제자매가 나란히 부모님께 세배를 드린다. 크리스마스가 없는 북한에서 설날은 가족끼리 선물을 나누는 명절이기도 하다. 선물은 보통 겨울철 옷이나 모자, 혹은 평소에 갖고 싶어 했던 것을 부모님이 기억했다가 사주곤 하셨다. 선물을 나눈 후에는 아침식사를 하는데 보통 만둣국을 먹었다. 만두는 돼지고기와 시래기, 두부를 잘게 썰어 함께 볶아낸 소를 넣은 것으로 어른 주먹보다 조금 작게 빚었다. 우리 집에서는 설날 당일에는 만둣국을 먹었고, 떡국은 나중에 먹었다. 북한에서는 설날에 대부분 만둣국을 먹는다. 떡국 떡을 만들기 위해 긴 떡을 만드는데 이것을 ‘떡국대’라고 한다. 가족이 함께 빚은 만두와 떡국대를 밖에 내놓아 자연 냉동시킨다. 북쪽 지방이어서 가능한 일이다.

차례와 아침식사가 모두 끝나고 오후가 되면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집은 명절 때마다 동네 사람들의 모임 장소가 됐다. 사람들은 그 이유가 우리 집 윷놀이 판이 동네에서 제일 크고 멋져서라고 했다.

나는 어릴 적부터 집에 손님이 오는 것을 좋아했다. 아버지는 평소에는 말 한마디 없다가도 손님만 오면 말 꾸러미를 풀어놓으셨는데, 지루하기 그지없는 러시아의 10월 혁명 이야기도 아버지 입을 거치고 나면 한 편의 동화처럼 흥미진진해졌다.

우리 집에 사람들이 모이는 데는 TV도 한몫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동네에 TV가 있는 집이 몇 집 안 됐다. 전기 사정이 어려운 북한이지만 설날만큼은 전기가 공급되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전기도 명절 공급’이라며 비아냥대기도 했지만, 어쨌든 설에 이웃들이 모여 함께 TV를 보는 풍경도 내 추억의 중요한 부분이다. 교통 사정상 명절에 친척들 간 왕래가 쉽지 않은 북한에서 이웃들 간 교류는 매우 중요하다.

줄당콩 갈라 ‘윷’ 만들어
지난해 2월 5일 노동신문이 윷놀이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공개했다. [노동신문]
지난해 2월 5일 노동신문이 윷놀이를 즐기는 시민들의 모습을 공개했다. [노동신문]

TV를 보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윷놀이가 시작된다. 윷놀이는 보통 가족 단위로 편을 나누는데 승패로 한 해 운수를 알 수 있다는 인식이 있어 승벽(勝癖)이 대단하다. 윷은 줄당콩으로 만든다. 북쪽 지방의 강낭콩을 줄당콩이라고 하는데, 한국의 강낭콩보다 알이 크고 굵으며 큰 것은 어른의 엄지발가락만한 것도 있다. 잘 영근 줄당콩은 윷으로 쓰기에 그만이다. 보통의 줄당콩은 검은색이다. 줄당콩을 반으로 가르면 윷이 된다. 승부욕이 지나쳐 바닥에 쾅쾅 뿌리다 보면 때로 콩알이 박산(깨어져 산산이 부서지는 것)나기도 한다.

윷놀이가 아무리 신난다 해도 설날의 백미는 역시 연날리기다. 나는 동생과 함께 벌거숭이 뒷산으로 올라간다. 거기서는 벌써 아이들이 연을 날리고 있다. 북쪽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계절풍은 연날리기엔 안성맞춤이지만 시베리아의 찬 기운은 매섭게도 시리다.

내 신호에 따라 동생이 잡고 있던 연을 놓는 순간 연은 마치 새매(수리과에 속한 소형 맹금류)처럼 창공으로 날아오른다. 우리 마음도 덩달아 연과 함께 붕붕 뜬다. 많은 연 중에 내 것이 제일 크고, 제일 높이 난다. 아이들이 주변에 모여들어 와와 감탄한다. 연은 우쭐한 내 마음인 양 바람을 타고 잘도 춤을 춘다. 어느덧 연실이 다 풀려서 연이 하나의 점으로 까마득하다. 할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당신이 어릴 적에는 연을 대문짝만 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연살은 대나무로 만들고, 연실은 명주실을 밧줄처럼 여러 겹으로 꼬아서 썼다고 한다. 연 종이는 창호지를 겹쳐서 풀칠해서 썼단다. 연이 커서 혼자 띄우지 못하고 여러 명이 함께 날려야 했다고도 한다.

나는 할아버지께 들은 얘기를 되새기면서 한없는 공상에 잠긴다. 자기도 날려보겠다고 콩콩 뛰던 동생은 손을 호호 불며 조금 날려보더니 이내 춥다고 집으로 내려가 버렸다. 하지만 내 공상은 계속된다.

‘만약 연을 크게 만들 수 있다면 내가 그 위에 탈 수도 있을 텐데. 아니면 줄을 튼튼하게 만들어 매달릴 수라도 있을 테지. 큰 연을 만들자면 뭐가 필요하지? 대나무는 내가 애용하는 낚싯대를 쓰면 되겠고, 연줄은 낚싯줄을 몇 겹으로 엮으면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람이 탈 수 있을 만큼 충분히 큰 종이를 어디서 구한담. 종이만 구할 수 있다면 다음 설에는 큰 연을 만들어볼 수 있을 거야’

공상에 빠진 동안 어느새 겨울의 짧은 해가 서쪽으로 기울었고, 나는 천천히 연줄을 감는다. 설날이 저물고 있는 것이었다.

남녘으로 훨훨 날아간 연

설날이 지난 이후에도 나는 종종 연을 띄웠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이제 연을 떠나보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저물녘 연을 들고 뒷동산에 올랐다. 뒷산에 오르기 전 크레용으로 ‘조국통일’ ‘2001축’이라고 쓴 글자를 한 번 더 진하게 덧칠했다.

나는 따라오겠다는 동생을 기어코 떼어놓고 갔다. 왠지 둘만의 이별로 간직하고 싶었다. 바람은 여전히 남쪽으로 불고 있었고 차가웠다. 그곳에는 오직 나밖에 없었다. 나는 천천히 연을 띄우고 연줄을 풀었다. 연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하늘 높이 잘도 올라갔다. 힘차게 돌아가던 얼레가 멈춰 서고 가벼운 충격이 손으로 전해질 때 마음이 철렁했다. 잠시 동안 갈등했다. 그러고는 얼레에 묶여 있는 연실의 매듭을 천천히 풀었다. 실의 끝이 얼레를 스쳐 지나다 잠깐 멈추었던 찰나의 순간을 기억한다. 나는 연 또한 나처럼 떠나기를 잠시 망설였음을 확신했다. 상실의 순간이자 자유의 순간이었다. 점이던 연은 먼지가 되더니 점차 공기가 됐다. 연이 사라진 내 눈 속에서 물방울이 솟아났다. 나는 고통과 쾌감을 함께 느꼈다. 그 순간의 아련한 상실감은 내 영혼에 오래도록 남았다. 그 고통과 쾌감은 첫사랑을 추억할 때의 감정과 닮았고, 많은 사람이 첫사랑의 추억을 소중히 꺼내 보듯이 나도 그때를 소중히 추억한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다가와 연 날리는 꿈을 꾸고 나면, 2001년의 그 연이 유독 잊히지 않고 눈앞에 보이는 듯 또렷하다. 그 시절 날려 보낸 연을 찾아 떠나고 싶어진다. 그 연은 과연 남녘의 어느 산기슭에 걸려 내려앉아 있을까. 덧칠해 놓은 크레용 자국은 20년 풍상에 얼마나 바랬을까. 만약 기적이 그 연을 찾아 떠난 나에게 재회를 허용해 준다면 나는 묻고 싶다, 창공을 나는 자유가 상실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가, 그 자유가 우리가 헤어져야 할 만큼 가치가 있는 것인가.

조의성 북한이탈주민·연세대 4학년

[이 기사는 신동아 2020년 2월호에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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