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렉시트 논쟁 끝낸 영국… “긍지 되찾고 싶지만 미래는 불안”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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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현장을 가다]
내년 1월 브렉시트 시행 결정… 영국 시민들, 기대와 불안심리 공존
스코틀랜드 등 독립 움직임 본격화… EU와 FTA 체결 못하면 ‘노딜’ 공포

보수당의 압승으로 끝난 영국 조기 총선 다음 날인 13일 런던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의회 앞을 사람들이 활기차게 걷고 있다. 2015년 270년 만에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한 웨스트민스터 건물처럼 영국의 미래도 내년 1월 브렉시트와 함께 리모델링될 것이라고 런던 시민들은 밝혔다.
보수당의 압승으로 끝난 영국 조기 총선 다음 날인 13일 런던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의회 앞을 사람들이 활기차게 걷고 있다. 2015년 270년 만에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한 웨스트민스터 건물처럼 영국의 미래도 내년 1월 브렉시트와 함께 리모델링될 것이라고 런던 시민들은 밝혔다.
김윤종 파리 특파원
김윤종 파리 특파원
“드디어 유럽연합(EU)의 속박에서 자유로워졌습니다. 영국은 다시 위대해질 겁니다.”

“착각이에요. 미래가 너무 불안합니다. EU에 남는 게 훨씬 영국에 도움이 됩니다.”

이달 12일 영국 조기총선에서 집권여당인 보수당이 하원 과반 기준(326석)을 훌쩍 넘는 365석을 확보하는 압승을 거뒀다. 보수당은 여세를 몰아 20일 하원에서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내년 1월 31일 시행, 2020년 12월 31일까지 EU와의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 미래관계 협상 종료 내용을 담은 EU탈퇴협정법안(WAB)을 통과시켰다. 2016년 6월 국민투표 이후 3년 반 동안 지지부진하던 브렉시트 시행이 코앞으로 다가온 셈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브렉시트에 대한 영국인들의 의견은 둘로 갈라져 있었다. 기자가 12일 총선 현장과 선거가 끝난 13일 런던 시내를 돌며 영국의 미래를 물어본 결과다.

○ “어쨌든 속이 시원하다”는 중장년층

런던의 한 식당에서 만난 60대 은퇴자 제프리 화이트 씨는 “안도감부터 생겼다”고 했다. 그는 자신의 의견을 런던 토박이 중산층인 장년 남성의 의견으로 한정해 달라며 이렇게 말했다.

“브렉시트가 미뤄진 3년 반 동안 정말 답답했습니다. EU의 통제가 불편했거든요. EU를 탈퇴하면 대가를 치르겠지만, 그래도 가야 할 길입니다.” 화이트 씨처럼 영국의 중장년층 상당수는 보수당의 압승과 브렉시트 시행에 대해 “영국이 다시 주권을 회복했다”며 정치적 혼란이 끝났다는 분위기였다. 앤디 필 씨(70)는 보수당의 압승에도 불구하고 13일 오전 런던 중심 웨스트민스터(국회의사당) 앞에서 ‘빨리 EU에서 탈퇴하라’고 외치며 1인 시위를 펼쳤다. 그 역시 “위대한 영국만의 길을 가야 한다”며 “영국인들의 정서에는 ‘영국은 유럽과 다르다’는 의식이 강하다”고 말했다.

섬나라인 영국은 역사적으로 유럽 대륙의 어느 국가와도 일방적인 동맹을 맺지 않았다.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 특정 국가가 세력이 강해질 때마다 영국은 그 상대편 국가를 지원하는 세력균형 정책을 추구해왔다. 이를 잘 드러내는 영국 외교정책 용어가 ‘위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다. 잦은 혁명과 전쟁으로 정치 구조가 급변해온 프랑스 등 다른 유럽 국가들과 달리 영국은 꾸준히 의회민주주의를 발전시킨 점도 외교 기조에 영향을 미쳤다.

이런 의식을 반영한 것이 EU 가입 과정에서 드러났던 영국의 태도다. EU의 뿌리는 독일, 프랑스 등 6개국 주도로 1958년 출범한 유럽경제공동체(EEC)에서 시작됐다. 당시 영국은 15년이 지난 1973년에야 EEC에 가입했다. 1992년 유로화와 유럽중앙은행(ECB) 출범의 계기가 된 마스트리흐트 조약에도 영국은 경제 주권을 이유로 반대했다.

이번 선거에서 보수당에 투표했다는 회사원 엔에스 씨(35)는 “당장 이민자 문제만 봐도 EU가 제대로 역할을 못 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수당의 총선 압승 원인으로 제1야당인 노동당의 텃밭인 중북부 석탄·제조업 밀집 지역 ‘레드월’에서의 승리가 꼽힌다. 이 지역은 일자리를 위협하는 이민자 유입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높은 곳이다.

○ “브렉시트 후회할 것”이라는 젊은이들

조기 총선이 열린 12일 오후 웨스트민스터 인근 투표장 앞에서 만난 테런스(65), 브라이언 씨(60) 형제.
조기 총선이 열린 12일 오후 웨스트민스터 인근 투표장 앞에서 만난 테런스(65), 브라이언 씨(60) 형제.
기자가 인터뷰한 영국인 중 자신의 사업을 하는 사람들 또는 20, 30대는 ‘난 잔류파(Remainer)’라며 야당을 지지했다고 말했다. 투표장에서 만난 테런스(65), 브라이언 씨(60) 형제는 “우리는 무역업자”라며 영국이 EU에 남아야 하는 이유를 설명했다.

“우린 노동당을 찍었습니다. 영국이 세계 최대 단일 시장 EU에서 떠나면 유럽의 한 나라에 불과해집니다. 당장 EU의 단일 시장, 관세동맹, 각종 세금 면제가 다 사라져 사업하기 힘들어져요.”

EU 회원국인 영국의 기업들은 아무 제한 없이 다른 EU 회원국에 상품을 수출했다. 브렉시트가 시행되면 영국산 제품을 유럽에서 팔 경우 관세 등 각종 장벽이 생긴다. 글로벌 기업들이 영국에서 철수해 다른 EU 회원국에 투자할 확률도 커진다.

영국 싱크탱크인 국립경제사회연구소(NIESR)는 “영국이 EU를 통하지 않으면 무역, 투자 손실은 물론이고 고용 감소, 경제 성장 둔화를 겪을 것”이라고 밝혔을 정도다. 영국 중앙은행인 잉글랜드은행(BOE)도 브렉시트로 자동차, 화학 등 영국의 주요 산업 수익성이 크게 악화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런던 시내에서 만난 맥 씨(22)는 “대학을 졸업하고 본격적으로 직장을 찾고 있다”며 “EU를 탈퇴하면 유학은 물론이고 해외취업에 타격이 생긴다”고 말했다. 총선 출구조사에서 보수당의 압승이 전해지자 런던정경대(LSE) 등 주요 대학 곳곳에서는 야유가 쏟아졌다.

거시적 경제 효과 외에도 브렉시트 후 나타날 일상의 불편함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컸다. 영국에서 소비되는 식료품의 30% 이상은 EU에서 수입된다. 그러나 EU를 탈퇴하면 통관 지체, 관세 부과 등으로 수입량이 줄고 가격은 인상될 가능성이 높다. 의료비를 절감해주는 유럽건강보험카드(EHIC) 역시 효력이 상실된다. 대학생 루시카 씨(20)는 “유럽에서 사용하는 휴대전화 로밍 요금마저 인상된다고 들었다. 좋을 게 없다”고 말했다.

○ ‘하나의 영국’이 사라진다는 공포

내년 1월 브렉시트를 앞둔 영국인들의 또 다른 화두는 ‘하나의 영국이 지속될 것인가’였다. EU를 떠나면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로 구성된 영국이 쪼개질 수 있다는 우려가 40대 이상에서 컸다. 50대 회사원 토머스 씨는 “EU 탈퇴는 좋지만 영국이 조각나는 건 반대”라며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인 니컬라 스터전 스코틀랜드국민당(SNP) 대표가 독립을 운운하는 걸 TV에서 보면 리모컨으로 화면을 끄게 된다”고 말했다.

실제 스코틀랜드 자치정부가 19일 영국 중앙정부에 분리독립 주민투표의 개최 권한을 공식 요구한 상태다. 스코틀랜드는 2014년 분리 독립을 위한 주민투표를 실시했다. 당시 반대 55.3%, 찬성 44.7%로 부결됐다. 그러나 브렉시트 시행 찬반 논란이 지속되자 스코틀랜드는 EU에 잔류해야 경제적 안정성이 유지된다는 여론이 커졌다. 분리 독립을 찬성해온 SNP가 이번 총선에서 스코틀랜드 59개 지역구에서 48석을 차지한 것도 이런 여론이 반영된 결과다.

이와 맞물려 영국령인 북아일랜드와 EU 회원국인 아일랜드의 통합 요구도 커지고 있다. EU와 영국은 북아일랜드에는 법적으로 영국의 관세체계를 적용하되 실질적으로 EU 관세동맹 안에 남기는 두 개의 관세체계, 이른바 ‘하이브리드 해법’을 넣은 브렉시트 합의안을 10월에 만들었다.

그럼에도 브렉시트 시행 후 북아일랜드와 아일랜드 간 자유로운 교류나 통행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면서 통일 요구가 커지고 있다. 일간 가디언은 “2024년 총선에서는 스코틀랜드가 독립해 우리가 알고 있는 영국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고 전했다.

이런 난관에도 불구하고 총선에서 압승한 보리스 존슨 총리는 내년 1월 31일 브렉시트 단행 이후 그해 말까지 EU와의 완전한 결별을 위한 모든 절차를 마무리하겠다는 입장이다. EU와 영국은 2020년 12월 31일까지 브렉시트 전환기간을 둬 FTA, 이민 문제, 안보 등 협상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통상 FTA 협상은 최소 3년이 필요하다. FTA 등 제대로 된 협의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전환기간이 연장되지 않으면 내년 12월 이후 사실상 ‘노딜 브렉시트’와 다를 바 없는 상태가 된다.

런던브리지에서 만난 회사원 맥신 매케이 씨(51)는 “브렉시트로 여러 문제가 생길 게 뻔한 만큼 차라리 빨리 문제가 불거지고 이를 하나씩 해결하면 좋겠다”며 “몇 년이 지난 후 브렉시트가 영국에 손해만 준 것으로 판명되면 다시 EU에 가입하는 국민투표를 요구하는 여론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혼란을 정치인들이 만들어냈고, 그 고통은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전가되는 모습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 런던에서 김윤종 파리 특파원 zoz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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