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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장날 첫 만세시위 실패가 저항의식 불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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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장날 첫 만세시위 실패가 저항의식 불붙였다

횡성=김지영 기자 입력 2019-12-14 03:00수정 2019-12-14 0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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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3·1운동 임정 100년, 2020 동아일보 창간 100년]
3·1운동 100년 역사의 현장 2부 <제84화> 강원 횡성
1919년 4월 1일 강원 횡성 장터에서 벌어진 만세시위는 강원도 내에서도 가장 격렬했던 것으로 평가받는다. 올해 횡성군에서 열린 3·1운동 100주년 기념행사에서 일제의 저격에 맞서 만세를 불렀던 군중을 재현했다. 횡성문화원 제공
‘3·1운동의 주요 유적지에 기념비를 세워 그 거룩한 정신을 만대의 후세까지 길이 받들어 드높이려 한(이희승 박사의 비문) 것은….’

동아일보 1972년 8월 17일자 5면에 게재된 기사의 한 구절로 강원 횡성에 세워진 ‘3·1운동 기념비’의 의미를 소개하고 있다. 이 기념비는 동아일보사가 3·1운동유적보존사업으로 전북 이리(현재 익산), 충북 영동에 이어 세 번째로 건립한 것이다. 당시 ‘강원도 내에서도 가장 격렬한 시위를 벌였다’(동아일보 1972년 8월 14일자)고 평가받을 만큼 횡성의 3·1운동은 뜨겁게 진행됐다.

○ “지난 장날의 실패를 생각하여…”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는 ‘독립운동사―3·1운동사’에서 3월 27일 횡성에서 처음 일어난 만세운동에 대해 ‘만족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고 적고 있다. 사정은 이랬다. 영영포리의 주민 신재근과 장도훈은 서울에서 3·1운동이 일어나자 횡성에서도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논의한다. 장도훈이 서울에 가서 독립선언서 40장과 태극기 20장을 가져왔고, 강만형이 함께해 만세시위 준비에 나선다. 영영포리에 횡성 천도교 본부가 있었고, 이들을 비롯한 주민 다수가 천도교인이었다. 횡성의 만세운동을 천도교인이 주도한 이유다.



3월 27일 장날, 주도 인물들이 모든 상점의 폐쇄부터 요구해 상점을 닫고, 시장에 모인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 관헌들이 이런 움직임을 먼저 알아챘다. 상점들이 문을 닫고 준비에 들어갈 때 헌병분견소에서 원주에 연락을 취해 헌병과 보병들을 불러들인 것. 신재근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려고 할 때 일제 헌병들이 들이닥쳤다. 시위 지도자들은 붙잡혔고 만세운동의 경험이 없던 군중은 해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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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양상으로 볼 때 실패로 여겨질 수 있지만 횡성의 첫 만세운동의 의의는 크다. 2017년 작고한 조동걸 전 국민대 명예교수는 “이것이 횡성군 각 마을에 전해져서 만세운동은 더욱 발전하게 됐고, 또 이것을 주동하던 천도교인도 보다 치밀한 계획에 의해 추진해 감리교인과도 연합해 4월 1일 큰 규모로 치열한 운동을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횡성의 3·1운동’) ‘독립운동사’에서도 ‘천도교회에서도 지난 장날의 실패를 생각하여 조직적으로 연락을 취하여 횡성읍(당시 횡성면)으로 출입하는 통로에 교인을 배치하고 마을에서는 교인이 장꾼을 인솔하였다’고 기록했다.

1972년 동아일보사가 강원 횡성에 건립한 ‘3·1운동기념비’.
○ 장터가 만세 소리로 진동하다

3월 27일 만세운동 때 붙잡힌 8명이 고문을 받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천도교인들은 분개하면서 저항의식을 키웠다. 횡성 천도교 대교구장 최종하가 4월 1일 장날을 앞두고 본격적인 시위 계획을 추진했고 우천면 법주리의 강승문, 안흥리의 김인경, 횡성면 읍상리의 전성수 등이 죽음을 각오하고 만세 군중을 동원하기 위해 밤낮으로 산을 넘으면서 활동했다. 3월 27일 장사를 하러 횡성장에 왔던 인제 주민 김윤신과 영월 주민 김성서도 맹활약했다. 천도교인이었던 이들은 4월 1일의 만세운동을 위해 장수로 가장하고 마을을 다니면서 인력 동원에 애썼다. 어떤 곳에서는 “이번 장날 구경거리가 많다”고 사람들에게 호기심을 불어넣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만세운동에 참가하지 않으면 집에 불을 놓을 것”이라고 협박하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만세운동은 천도교의 범위를 넘어 확대되기 시작했다. 횡성청년회에 소속된 윤태환과 감리교회의 지도자 정해경, 탁영재가 시위 준비에 합류한 것이다. 당시 횡성면 내에 있던 감리교회는 활동이 크진 않았지만 청년층에 호응을 얻고 있었고, 횡성보통학교 졸업생을 중심으로 한 청년들이 횡성청년회를 조직해 문화운동을 추진하고 있었다. ‘독립운동사’는 “이런 형편에 감리교회의 정해경과 청년회의 윤태환이 힘을 모았다는 것은 횡성 3·1운동을 천도교인만의 시위가 아닌 대중운동으로 발전시키는 데 중요한 몫이 되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강원도 장관의 보고에 따르면 4월 1일 만세 군중은 1300명으로 추산된다. 조동걸 교수는 “당시의 보고에 나타난 인원은 국제적 체면 관계로 인원을 줄여 보고 처리하는 것이 보통이니 수천 명의 장꾼이 모였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독립운동사’에서도 1300명이라는 보고서의 수치는 “온 장터가 만세 소리로 덮였고 상점을 철폐하고 온 장꾼이 가담했는데 그 정도뿐이랴?”라며 의문을 표시했다. 4월 1일 군중이 시장에 모여드는 장면을 두고 ‘횡성의 3·1운동’에서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아침부터 심상치 않은 표정으로 모여드는 나라 잃은 백성, 일본의 말굽에 밟힌 지 10년 그동안 갖은 고생을 겪으며 참아 왔던 백의민족의 행진이 횡성 장터로 아침부터 모이기 시작했다. 일본 군대에 끌려가기 위함이 아니요, 징용이나 징발에 끌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함이요, 횡성에 주둔하여 행패를 부리는 일제 헌병을 몰아내기 위해서 모였다.”

장터로 들어오는 길목과 장터 곳곳에서 주로 천도교인들이 나서서 군중에게 이날의 계획을 설명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파악한 일본 관헌도 준비에 나섰다. 군청과 면사무소의 주요 서류를 감추고 군수와 면장이 관리에게 비상대기령을 내렸다. 군수가 직접 면사무소로 와서는 “오늘 총소리가 나도 놀라지 말고 폭동에 대비하라”고 훈시하기도 했다. ‘이날 오전은 마치 전쟁을 앞에 둔 사람들의 움직임이었다.’(독립운동사―3·1운동사)

날이 저물기를 기다린 건 군중의 심리나 일제 헌병의 심리나 같았다. 군중은 총을 피하기 좋다는 생각에 저녁 시위를 기대했지만, 헌병들은 무차별 총격을 하기 좋다고 판단했다. 헌병들은 조선군 사령관으로부터 ‘강력히 무기를 사용해서 폭동을 조속히 진압하라’는 특별 명령을 받은 상태였다.(‘횡성의 3·1운동’)

○ ‘황소아줌마’의 활약

만세 소리가 터진 시점은 오후 3시였다. 천도교 교구실에 태극기가 높이 솟자 시위 군중은 태극기와 몽둥이, 장작 등을 들고 관공서 앞 게시판, 군청 건물, 문을 닫지 않은 상점 등을 부수기 시작했다. 일제 관헌들은 도망해 몸을 숨겼고 횡성 헌병분견소의 헌병들이 총을 겨눈 채 분견소를 지키고 있었다. 이때 ‘코지마’라는 헌병이 말을 타고 거리에 나타나자 군중은 “저놈 죽여라!”라고 소리쳤다. 시위대에 있던 최동수가 뛰쳐나와 헌병을 끌어내렸고, 밟고 때렸다. 동시에 총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한국독립운동정보시스템, ‘한국 독립운동의 역사’)

총격에 시위대는 일순간 멈칫했지만 해산하지는 않았다. 다시 만세 소리가 읍내를 뒤흔들고 시위대는 헌병분견소를 향해 이동했다. 수비대 총구에서 불이 뿜어졌고, 총성이 이어지는 가운데 밤은 깊어갔다. 총격으로 5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이날 시위 현장에서 붙잡힌 주도자 강만형은 모진 고문 끝에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다. 그는 전 횡성 천도교 대교구장 강도영의 아들로, 강도영이 구한말 의병장으로 독립운동을 하다가 전사한 뒤 부친의 뒤를 이어 천도교 지도자로 활동했던 인물이다.

‘황소아줌마’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횡성의 3·1운동’에서 4월 1일 횡성 만세운동 때 “횡성면 옥동리 한치고개에서 주막을 운영하던 여자 ‘황소아짐마’도 술판에 어울려 만세운동을 역설한다”고 소개된 여성이다. 동아일보 1990년 2월 28일자 14면에 이 여성의 일대기가 실렸다. 김순이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30대에 남편과 사별하고 남매를 키우면서 한치고개에서 주막을 차리고 생계를 꾸려갔다. 그는 6척 거구에 웬만한 장정보다 힘이 세 주민들 사이에서 황소아줌마로 불렸다. 천도교인들이 만세시위 계획을 세울 때 황소아줌마가 주막 뒷방을 모임 장소로 내주면서 3·1운동에 가담하게 됐다.

그는 4월 1일 만세운동 때 일제 경찰의 총격에 놀란 사람들이 술집으로 몰려와 숨자 부엌칼을 들고 이들을 위협해 시위 현장으로 내몰 정도로 담력도 셌다. 일제 경찰에 체포돼 3개월간 옥고를 치르고 주막에서 번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헌납하기도 했던 그의 삶은 뒤늦게 조명받았다. 당시 동아일보 보도는 “이름 없는 한 주모에 대한 이 같은 새로운 평가는 민중 주도의 항일운동을 본격 조명하는 데 큰 의의가 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 “동지들 곁으로” 출옥후에도 中향한 최양옥 지사 ▼

횡성시위 참여했다 체포뒤 탈출, 비행사 안창남 등과 공명단 조직
비행학교 자금 모집 나섰다 옥고
가족의 눈물어린 만류 뿌리치고 이국땅으로 독립운동하러 떠나

1929년 4월 22일자 동아일보 지면에 실린 최양옥 지사의 모습(왼쪽에서 두 번째). 우편수송차를 습격했다가 체포됐을 당시의 현장 사진이다.
동아일보 1929년 4월 22일자 2면에 공명단 사건의 주역들이 체포됐다는 소식이 실렸다. 2면 전체를 할애해 소개된 대대적인 보도였다. 기사에 따르면 이들은 서울 교외 망우리 인근에서 일제의 우편물 수송차와 승합차를 습격해 현금을 탈취하고 운전사와 승객들에게 ‘대한독립 공명단 만세’를 세 차례 외치게 했다.

공명단(共明團)은 1928년 중국에서 조직된 독립운동 단체다. 비행사 안창남을 비롯해 3·1운동 직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계해 군자금을 모집하다 옥고를 치른 신덕영 최양옥 등이 설립했다.

최양옥(1893∼1983)은 공명단의 단장이었다. 강원 횡성 출신인 그는 서울의 중동중학교에서 공부하다 3·1운동을 맞았다. 파고다공원에서 만세운동에 참가한 뒤 낙향한 그는 4월 1일 횡성 장날에 벌어진 만세시위에 참여해 체포됐다가 탈출한다.

이후 최양옥은 공명단 단원 김정련 이선구와 함께 다시 국내에 잠입했다.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비행학교를 세우기 위한 자금을 모집하기 위해서였다. 백주대낮에 벌어진 우편차 습격도 이 목적을 위해서였다. 이들을 붙잡기 위해 일제 경찰은 총동원됐다. 최양옥이 붙잡혔던 순간을 동아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범인은 불의에 경찰의 습격으로 피착은 되었으나 그대로 태연자약하여 포승에 얼키어 문 밖을 나가서는 그를 둘러싼 신문기자들에게 향하여 ‘기자로서 해외에 공명단이라는 유력한 단체의 존재를 모르고 공명의 명자를 울명자로 잘못 게재하였다’는 것을 소리쳐 성명하고 경찰의 호위 속에 종로서로 향하였다.”

최양옥 지사는 징역 10년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고 광복 후에는 서울형무소 서무과장, 인천형무소장 등을 역임했다. 생전에 그를 만난 박순업 횡성문화원장은 “선생은 옥고를 치르다 출옥한 뒤 ‘동지가 필요하다’는 중국에서의 연락을 받고는 가족의 눈물어린 만류를 뿌리치고 이국땅으로 향했던 분”이라면서 “최양옥 지사를 비롯해 치열하게 독립운동을 한 지사들로 인해 횡성은 애국의 고장으로 불리게 됐다”고 말했다.

횡성=김지영 기자 kimj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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