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커 vs 브랜드[간호섭의 패션 談談]〈28〉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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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말표 고무신, 백설표 설탕, 곰표 밀가루를 기억하시나요?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친숙했던 ‘메이커’ 상표들입니다. 말처럼 튼튼하게 달릴 수 있는 질긴 고무신, 하얀 눈처럼 새하얗고 반짝이는 설탕, 북극곰의 털처럼 폭신하고 부드러운 밀가루 등 무언가 만드는 제품이 연상되면서도 쉽게 기억될 수 있는 것들을 상표(商標)나 상표명(商標名)으로 사용했죠. 영어 교육이 보편화되지 않은 시대적 상황을 고려하면 첨단 마케팅 기법이었습니다. 지금의 ‘브랜드’인 셈이죠. 이 메이커들을 선호하는 소비자들은 차별화된 품질에 대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비싼 듯해도 써보면 다르다’는 만족감은 다른 종류의 메이커 제품들을 구입할 때도 그런 기대감과 믿음을 만들어 냈습니다.

패션에서의 메이커 제품은 늦은 감이 있었습니다. 일찍이 직물산업은 부산방직, 전남방직, 충남방직 등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들이 존재했고 한일합섬, 선경직물 등 회사명을 메이커로 한 차별화된 섬유기업들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패션산업은 1970년대에 가서야 대기업에서 반도패션, 제일모직 등으로 기성복 산업에 진출했죠. 초기에는 맞춤복에 익숙한 소비자, 높은 가격 등을 이유로 판매가 저조했지만 곧 기성화된 사이즈 체계의 정립과 빠른 시간이 중요한 자산이 된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메이커 패션의 시대가 열렸습니다.

뒤늦게 메이커 시대에 돌입한 패션산업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가장 빠르게 브랜드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제조사인 메이커의 상표만으로는 세분되는 남성, 여성, 아동, 캐주얼, 스포츠 웨어 등의 카테고리를 섭렵할 수 없었기 때문이죠. 이때부터 발음하기도, 기억하기도 어렵지만 제조사의 정체성을 나타낼 수 있는 패션 브랜드들이 등장했습니다. 잇달아 가전·전자업체들도 제조사인 메이커를 포기하고 TV, 냉장고, 오디오 등의 카테고리별로 브랜드를 내세웠습니다. 집에도 브랜드 열풍이 불었습니다. 건설회사의 메이커보다 어느 브랜드의 아파트에 사느냐가 중요해졌죠.

우리는 패션부터 가전, 자동차, 아파트까지 메이커 아닌 브랜드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디자인하고 설계하는 전문 인력들조차 브랜드가 되고 있죠. 제품으로 치면 메이드 인 코리아, 메이드 인 이탈리아라는 국적보다 어느 나라에서 교육을 받았는지, 활동을 하는지가 중요해졌습니다. 또 성별보다는 가정과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가 중요해졌습니다. 그래서 주어진 틀에 갇히기보다 그 틀을 벗어나 서로 협력하는 컬래버레이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에 패션은 여러분이 전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하나의 브랜드로 도약할 때 훌륭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스티브 잡스(사진)가 입은 블랙 터틀넥과 청바지, 그리고 흰색 스니커즈가 더 이상 메이커 제품이 아니라 사람을 브랜드로 만드는 도구가 된 것처럼요. 내가 어떤 옷이 많은지,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옷장을 한번 들여다보세요. 나라는 브랜드는 이미 옷장 안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간호섭 패션디자이너·홍익대 미술대 교수
#메이커#브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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