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년 연장뒤 되레 조기퇴직 증가… 문제는 ‘연공서열 임금’[인사이드&인사이트]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0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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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세로 정년 재연장 논의 후끈
정부 2016년 ‘60세 정년’ 의무화… 기업들, 고령 직원 고임금 부담
명퇴-정리해고 등 조기퇴직 급증… 65세 연장땐 청년고용도 더 타격
한국, 30년차-신입 임금차 4.4배… 1.6배 수준 EU 평균의 두 배 훌쩍
직무급 도입땐 임금격차 줄지만 노동계 강력 반발해 실현 미지수

유성열 기자
유성열 기자
수도권 대학의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있는 A 씨(61)는 친구들 중 유일한 ‘근로자’다. 친구들은 대부분 60세에 정년퇴직을 하거나 그 전에 명예퇴직을 당해 ‘실업자’로 지내고 있다. 연금이 부족해 일자리를 구하려고 해도 60세를 넘긴 이에겐 마땅한 일자리가 없다.

A 씨가 일하는 대학은 지난해 환경미화원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면서 정년을 65세로 늘렸다. 때마침 정년을 앞두고 있던 A 씨에게도 5년을 더 일할 기회가 생겼고, A 씨는 주저 없이 더 일하기로 마음먹었다.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자녀들을 뒷바라지하려면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그는 이 대학에서 65세까지 꽉 채워서 일한 뒤 퇴직할 계획이다.

고령화시대와 인구 감소가 현실화되면서 정년 연장 문제가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다. 현 정부는 일본식 ‘계속고용제도’의 도입 논의를 시작하겠다며 정년을 사실상 65세까지 늘리는 방안을 공식화했다. 그러나 정년 60세를 전면 시행한 지 2년밖에 지나지 않은 상황에서 또 정년을 늘리면 노동시장 자체가 위축될 것이란 우려가 많다. 특히 연공성이 강한 국내 임금체계를 먼저 개편해야 한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 60세 정년 3년 만에 정년 연장 논란

국내 노동시장에서 2015년까지 정년에 대한 ‘개념’은 있었지만 ‘법’은 없었다. 개별 기업들이 단체협약 또는 취업규칙으로 정년을 뒀고, 대부분의 사업장이 관행적으로 58세를 정년으로 설정했다. 정년 설정 여부와 정년 연령을 노사 자율에 맡기는 방식이었던 셈이다.

2013년 여야와 정부는 법정 정년이 최소 60세는 돼야 한다고 뜻을 모으고 고령자고용촉진법을 개정했다. 고령자고용촉진법 19조 1항의 ‘사업주가 근로자의 정년을 정하는 경우에는 정년이 60세 이상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문구를 ‘사업주는 근로자의 정년을 60세 이상으로 정해야 한다’로 개정하면서 60세 정년을 의무화한 것이다. 당시 국내 기업의 정년이 대부분 58세였기 때문에 사실상 정년을 연장하는 방안이었다.

경영계가 “기업의 인건비 부담이 급증해 고용을 위축시킬 수 있다”며 강하게 반대했지만, 개정안은 무난하게 국회를 통과했다. 이에 따라 60세 정년은 2016년 1월 1일 300인 이상 사업장부터 시행됐고, 2017년부터 모든 사업장으로 확대됐다. 이때부터는 사업주가 근로자의 정년을 60세 미만으로 정한다고 해도 아무런 법적 효력을 갖지 못하게 됐다. 정년을 어긴다고 해서 형사처벌을 받는 것은 아니지만 노동시장에 막강한 규제가 등장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최근 정부는 60세 정년이 전면 시행된 지 불과 2년 만에 정년 연장 논의에 다시 불을 붙였다. 범부처 인구정책 태스크포스(TF)는 지난달 19일 60세 정년은 그대로 두되 기업이 정년 후에도 근로자를 계속 고용하도록 유도하는 ‘인구구조 변화 대응 방안’을 내놓았다. 정부가 모델로 삼는 것은 일본식 계속고용제도다. 일본은 근로자가 정년을 맞을 경우 △재고용 △65세로 정년 연장 △정년 폐지 중 하나를 적용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법정 정년을 65세로 못 박진 않았지만 사실상 법정 정년이 65세인 셈이다. 아베 신조 정부는 이마저도 부족하다고 보고 70세까지 정년을 늘리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정부는 문재인 대통령 임기 내에 정년 연장 논의를 본격화할 계획이다. 올해부터 내부 검토를 거친 다음 2022년부터 계속고용 기간과 적용 업종 등을 정한다는 복안이다. TF 논의 과정에서 정년 연장 의지를 강하게 주장한 기획재정부와 신중론을 펼친 고용노동부 사이에 의견차가 노출되기도 했지만, 문 대통령이 2일 노인의 날 축사를 통해 정년 연장 계획을 공개적으로 밝힘에 따라 관련 논의가 더 힘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 조기퇴직자 늘어나는 정년 연장의 역설

정부가 이렇게 ‘속도전’으로 정년 연장을 추진하는 이유는 고령화가 예상보다 더 빨리 진행되고 있어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8년 취업자 가운데 청년층(15∼29세)의 비율은 2005년에 비해 5.1%포인트 감소했지만, 55세 이상 고령자 비율은 11.3%포인트 급증했다. 국내 인구 구조는 물론이고 노동시장 자체가 고령자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 위기감을 느낀 정부는 정년이라도 연장해서 기업에 필요한 인력을 노동시장에 가급적 오래 남겨야 다가올 인력 부족에 대응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인구 고령화에 먼저 접어든 미국, 영국 등은 이미 정년제를 폐지했고 독일(65세) 등 많은 국가들이 정년 연장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60세 정년 시행 후 국내 노동시장에서는 정부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됐다. 법정 정년이 시행됐음에도 정년퇴직자보다 권고사직, 명예퇴직, 정리해고 등 ‘비자발적 조기퇴직자’가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6년 35만5000명이던 정년퇴직자는 올해 35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반면 같은 기간 조기퇴직자는 41만4000명에서 60만2000명으로 18만8000명(45.4%)이나 급증했다. 올해 55∼64세 퇴직자 가운데 정년퇴직자의 비율은 7.1%로 2016년(8.2%)보다 1.1%포인트 감소한 반면, 조기퇴직자 비율은 12.2%로 2.6%포인트 늘었다. 기업들이 고령자들을 일찍 내보내는 방식으로 정년 연장에 대응하면서 정년퇴직자는 줄고 조기퇴직자는 느는 ‘정년 연장의 역설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셈이다.

○ “임금체계 개편이 먼저”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이런 현상이 벌어지는 근본적인 이유로 연공성이 강한 임금체계를 꼽는다. 한국 근로자의 근속기간별 임금격차는 주요 선진국 중 최고 수준이다. 한국경제연구원에 따르면 한국의 30년 이상 근속자 임금(2016년 기준)은 1년 미만 근속자 임금의 4.39배에 이른다. 유럽연합(EU) 평균(1.62배)의 두 배를 훌쩍 뛰어넘는 수준이다. 고용노동부가 2016년 30년 이상 근속자 임금과 1년 미만 근속자의 임금을 비교한 결과에서도 연공성이 비교적 강하다고 알려진 일본(2.46배)의 임금격차가 한국(3.29배)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국노동연구원이 ‘고령시대, 적합한 고용시스템의 모색’을 주제로 지난달 26일 개최한 세미나에서 전문가들은 정년 연장에 대한 우려를 쏟아냈다. 주제 발표를 맡은 남재량 노동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임금이 경직적인 상태에서는 (인건비 부담으로) 정년 연장이 조기퇴직의 증가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며 “정년 연장은 고령화에 대한 만능 처방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남 연구위원은 “정년 연장이 실제 퇴직 연령 상승으로 연결되기 위해서는 임금 경직성 해소가 필수”라고 덧붙였다.

만약 현재의 임금체계가 유지되는 상황에서 정년이 또다시 연장되면 가뜩이나 어려운 청년 고용을 더 위축시킬 수 있다는 비판도 많다. 기업들이 정년 연장에 따른 인건비 부담 때문에 청년 고용을 주저할 가능성이 많아서다. 국내에서는 고령자 1명을 고용하는 데 드는 비용이 청년 3∼4명을 채용하는 인건비와 맞먹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장기적으로는 연공서열형 호봉제를 폐지하고 직무급제를 도입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청년과 고령자의 임금격차를 줄여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직무급제가 활성화되면 연공이 아닌 직무에 따라 임금이 정해지기 때문에 임금격차 문제가 상당 부분 해소될 수 있다. 11일 본위원회를 열고 공식 출범할 2기 경제사회노동위원회는 연공성이 강한 공공부문 임금체계 개편을 본격적으로 다룰 예정이다. 고용부도 직무급 도입을 위한 지침을 만들어 현장에 배포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그러나 노조 동의 없이는 임금체계 개편이 사실상 불가능하고, 노동계가 직무급제 도입을 강하게 반대하고 있어 현 정부 임기 내에 실현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현재 시행 중인 60세 정년의 실태와 효과를 면밀히 분석한 다음 그 결과를 가지고 정년 연장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권순원 숙명여대 경영학부 교수는 “단순히 인구가 고령화됐으니 더 일해야 한다는 규범적 차원으로 접근하면 부작용을 초래할 가능성이 크다”며 “60세 정년의 성과와 실태, 조기퇴직에 미친 영향 등을 종합적으로 점검하는 한편 연공 간 임금격차를 줄이는 방안을 먼저 모색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성열 기자 ryu@donga.com
#정년 연장#조기퇴직자#정년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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