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벌보다 강한 화해…‘대화 모임’으로 석달간 이웃갈등 32건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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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9년 8월 7일 18시 5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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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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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3일 인천 계양경찰서 상담실에서 마주앉은 안모 씨(20)와 고모 씨(40·여)는 눈을 맞추지 않았다. 안 씨는 주먹을 꽉 쥐고 있었고, 고 씨는 충혈된 눈으로 천장을 쳐다봤다. 인천의 한 아파트에서 아래위층 이웃으로 만난 안 씨와 고 씨는 2년 가까이 이어진 ‘층간소음 갈등’으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었다. 소음을 참다못한 아래층 안 씨가 6월 7일 위층 고 씨의 현관문에 킥보드를 집어던지자 고 씨는 안 씨를 재물손괴 혐의로 신고했다. 그간 인터폰으로 험한 말만 주고받았던 양측이 지난달 3일 처음으로 마주앉은 것이다.

이 자리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질신문이 아니라 양측의 갈등 해소를 위한 ‘대화 모임’이었다. 층간소음으로 인한 다툼을 여러 차례 수사해본 경찰은 안 씨를 처벌해도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고 오히려 감정의 골이 더 깊어져 다른 물리적 충돌이 재발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안 씨와 고 씨를 설득해 자리를 만들고 대화 전문기관 ‘비폭력평화물결’에 중재를 맡긴 것이다.

안 씨의 어머니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릴 적부터 소리에 민감했던 안 씨가 층간소음에 얼마나 괴로워했는지 털어놓았다. 고 씨가 눈물을 흘리며 말을 받았다. 안 씨를 신고한 후 여섯 살 난 딸이 보복의 불안에 떨어 폐쇄회로(CC)TV까지 설치했다는 얘기였다. 안 씨의 눈에도 물기가 돌았다. 안 씨는 “폭력적인 행동으로 불안을 드려 죄송하다”며 다시는 협박이나 욕설을 하지 않기로 약속했다. 오랜 갈등이 봉합되는 순간이었다.

안 씨와 고 씨의 만남은 경찰청이 4월 말부터 서울 경기 지역의 15개 경찰서에서 시범 도입한 ‘회복적 경찰 활동’으로 성사됐다. 가해자를 엄벌에 처하는 것만큼 피해자의 상처를 회복하고 당사자들의 화해를 돕는 게 중요하다는 ‘회복적 사법’을 처음으로 경찰 단계에 도입한 것이다. 지난달 말까지 54건의 만남 요청이 접수돼 이 중 32건에서 화해나 변상 등의 형태로 조정이 완료됐다.

대화 모임이 특히 빛나는 건 가해자가 10~13세 촉법소년이라서 형사 책임을 물을 수 없을 때다. 지난달 8일 서울 중부경찰서에선 빌라 현관문 벨을 누르고 도망가는 일을 반복했던 A 군(14) 등 중학생 5명과 피해자 B 씨(63)가 마주앉았다. 사소한 장난이라고만 생각했던 A 군은 와병 중인 B 씨의 아내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었는지 듣고 잘못을 눈물로 뉘우쳤다. 경기 동두천시에선 사회봉사 등 처분도 내릴 수 없는 9세 어린이 사이의 폭행 사건을 경찰이 나서서 중재한 사례도 있다.

오랜 기간 친분을 맺은 이웃 사이의 사건에서도 대화 모임의 효과가 나타났다. 서울 성동구의 한 편의점에서 팩 소주를 훔쳐가곤 했던 이웃 장모 씨(49)를 고민 끝에 신고한 점주 신모 씨(51·여)가 그랬다. 대화 모임을 통해 장 씨로부터 진심어린 사과를 받은 신 씨는 “관계가 껄끄러워질까봐 걱정했는데 다행이다”라며 안도했다. 이 사건을 담당한 성동서 이효정 경장은 “대화 모임은 지역 공동체의 결속을 위해서도 필요한 제도”라고 말했다.

경찰청은 이 제도를 10월 말까지 시범 실시한 뒤 내년에 전국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심보영 경찰청 피해자보호기획계장은 “검찰과 법원에도 비슷한 제도가 있지만 그땐 당사자끼리 갈등이 너무 깊어 회복이 어려운 경우가 많다”라며 “경찰 단계에서 사건 초기부터 적극적으로 갈등 해결과 조정을 시도하겠다”고 말했다.

조건희 기자 becom@donga.com
김은지 기자 eun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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