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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다 타버렸다” 잿더미 강원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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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이 다 타버렸다” 잿더미 강원의 눈물

강릉=김재희 기자 , 속초=이인모 기자 , 고성=김민찬 기자 입력 2019-04-06 03:00수정 2019-04-06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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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 산불 재난사태 선포]강원 동해안 휩쓴 산불 ‘악몽의 밤’
“10년 일군 터전이 5분새 사라져”
거동 힘든 이웃 대피돕던 이장부부, 강풍타고 덮친 불길에 집 잃기도
文대통령 “특별재난지역 검토”
“평생 마련한 집인데… 숟가락 하나도 못 건졌소” 5일 강원 고성군 토성면 주민 김명곤 씨가 허망한 표정으로 불에 타 폐허가 돼버린 2층 집 앞에 주저앉아 있다. 김 씨는 “장애가 있는 딸을 데리고 대피하느라 집에서 숟가락 하나 갖고 나오지 못했다”며 울먹였다. 전날 고성군에서 시작돼 강풍을 타고 속초시까지 번진 불과 강릉시 산불로 주택 134채가 소실됐다. 고성=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10년에 걸쳐 갖춘 건데 5분도 안 돼 다 사라졌어요. 불과 함께 제 10년도 타버렸네요.”

5일 강원 강릉시 옥계면에 사는 허금석 씨(64)는 뼈대만 앙상히 남은 트랙터와 이앙기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허 씨는 4일 강원도 일대에서 발생한 대형 산불로 지난 10년간 차곡차곡 장만한 농기구 7대를 순식간에 모두 잃었다. 1억 원의 빚을 내 마련한, 그의 ‘전부’였던 농기구들이다. 보온덮개까지 씌워 애지중지 키웠던 고추, 고구마 모종 수천 포기도 불에 타 사라졌다. 허 씨는 “올해 농사는 이제 끝났다. 젊었을 땐 빚 갚을 힘이라도 있었지만 이젠 살아갈 방법이 막막하다”며 울먹였다.

강원 고성군과 속초시, 강릉시, 인제군 일대를 덮친 불덩이는 삶의 터전을 한순간에 집어삼켰다. 고성군 토성면에서 가구점을 하는 정환평 씨(62)는 가게 건물은 물론이고 수억 원어치의 가구도 모두 잃었다. 정 씨는 “어찌 이리도 모조리 앗아갈 수 있느냐”며 허망해했다. 장애가 있는 딸(40)을 돌보는 김명곤 씨(73)는 “딸을 대피시키느라 집에서 숟가락 하나도 못 챙겨 나왔다. 휴대전화도 안 사고 평생 농사지으며 겨우 마련한 집인데…”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강릉시 옥계면에 사는 노부모가 걱정돼 강릉 시내에서 황급히 고향집을 찾은 딸 김모 씨(53)는 타다 남은 패딩 점퍼와 신발을 가슴에 품고 울었다. 김 씨는 “추운 데서 농사지으시는 부모님을 위해 남매들이 돈을 모아 사드린 건데 ‘귀한 옷 더럽히고 싶지 않다’고 포장도 뜯지 않으셨다”고 말했다. 김 씨가 집에 왔을 때 어머니는 폐허가 된 집터에서 장독을 어루만지며 울고 있었다고 한다. 어머니가 수년간 담가 온 장이다.

마을이장인 김 씨의 아버지는 “대피소로 가라”는 자식들의 전화를 받고도 대피 안내 방송을 한 뒤 아내와 함께 이웃집을 찾아 뛰어다녔다. 거동이 힘든 노인들을 대피소로 안내하기 위해서였다. 이 부부가 귀가했을 땐 이미 집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아내는 “손주들한테 줄 반지를 가져와야 한다”며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남편이 가까스로 말렸다. 딸 김 씨는 “할아버지 때부터 삼대가 살아온 집이라 100년이 훌쩍 넘었다. 우리한테는 작은 시골 궁전이었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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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방호스 잡은 주민 100여명,동틀 때까지 화마와 맞섰다 ▼

마지막까지… 5일 강원 고성군 토성면 서천리에서 한 소방관이 불에 타 무너져 내려 재만 남다시피 한 집터의 잔불을 끄고 있다. 전날 발생해 고성과 속초의 임야 250ha를 태운 산불은 인근의 토성면 원암리에서 시작됐다. 고성=양회성 기자 yohan@donga.com
강원 속초에 사는 김영갑 씨(58)는 혼자 사는 누나(67)가 걱정돼 고성 누나 집을 찾았다가 속초로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김 씨는 거동이 불편한 누나를 부축해 집 밖으로 옮긴 뒤 집 주변 잔불을 끄기 위해 호스로 물을 뿌리다 변을 당했다. 갑자기 거세진 바람으로 연기가 크게 일면서 유독가스가 그를 덮친 것. 김 씨의 아내(46)는 남편이 “누나한테 잠시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서던 모습이 마지막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고 했다. 그는 빈소에 놓인 남편 영정 앞에서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그렇게 말렸는데… 우리 아이들은 어떡하라고…”라며 흐느꼈다.

수학여행 버스에 불이 옮겨 붙어 참사로 이어질 뻔한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강원 양양군으로 수학여행을 온 경기 평택시 현화중 2학년 학생들은 4일 밤 묵고 있던 한화리조트 앞까지 불길이 번지자 버스 7대에 나눠 타고 급히 숙소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속초 시내를 지나던 중 강풍을 타고 날아든 불씨가 버스 한 대에 옮겨 붙은 것. 버스 안에 있던 학생 29명과 교사 등 33명이 탈출한 뒤 3분 만에 차량이 전소됐을 만큼 위급한 상황이었다.

소방당국이 4일 밤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급속히 확산되는 불길을 잡는 데 온 힘을 쏟는 사이 주민들은 아비규환 속에서도 희생정신을 발휘해 서로를 도왔다. 5일 오전 2시 속초시 금호동의 한 아파트 주민 100여 명은 단지 내 소방호스를 끌어모아 불이 난 뒷산까지 무려 800m 길이로 연결했다. 주민들은 일렬로 늘어서 소방호스를 잡고 “물 열어!” “물 잠가!” “앞으로 직진!” 등의 구호를 외치며 불을 껐다.

거동이 불편하거나 치매를 앓는 노인 48명이 살고 있는 고성군 ‘까리따스 마태오’ 요양원에서는 수녀와 직원들이 나서 노인들을 모두 무사히 대피시켰다. 수녀들은 물에 적신 수건을 노인들의 코와 입에 대고 마스크를 씌워주며 구조대를 기다렸다. 한 수녀는 “평소 소방훈련을 하며 불이 났을 때 젖은 수건을 댄 채로 마스크를 착용하는 연습을 자주 했다”며 “불길이 한창 커질 땐 너무 무서워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속초시 평강요양원 직원들도 80, 90대 마을 노인 21명을 요양원으로 무사히 대피시켰다.

강릉시에서 펜션을 운영하는 최송이 씨(36)는 대피소를 찾지 못하는 주민들에게 무료로 방을 내줬다. 강릉시에 사는 황주성 씨(36)는 주민들이 신속히 대피할 수 있도록 구글 ‘지도만들기’ 서비스를 이용해 화재 발생 지역을 점으로 표시해주기도 했다.

○ 강풍 겹친 산불, 여의도 1.8배 면적 집어삼켜


4일 강원도 일대를 덮친 산불은 강풍을 타고 이틀 동안 525ha의 산림을 집어삼켰다. 여의도(290ha)의 1.8배, 축구장(7140m²) 735개 크기에 달하는 면적이다. 산림당국은 5일 날이 밝자 헬기 45대와 인력 1만3000여 명을 투입해 큰 불길을 잡았다.


강원도현장대책본부에 따르면 이날 오후 2시 현재 고성·속초 250ha, 강릉·동해 250ha, 인제 25ha의 산림이 훼손된 것으로 집계됐다. 강원도 일대의 산불로 주택, 창고 등 280여 채가 불에 탔다. 주민 4000여 명이 집 인근 학교나 체육관 등 지정 대피시설과 친척집, 숙박시설 등으로 몸을 피해 하룻밤을 보냈다. 이 지역 4개 시군의 유치원과 초중고교 52개교가 5일 휴업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이날 국가위기관리센터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산불 피해가 난 강원도 지역에 대해 “특별재난지역 지정을 검토하는 것도 서둘러 달라”고 지시했다. 특별재난지역으로 지정되면 주민 생계안정 비용과 복구에 필요한 비용을 예산으로 지원할 수 있다.

정부는 또 이날 속초시와 강릉시, 동해시, 고성군, 인제군 일대에 인력·물자 동원 등 응급조치가 신속히 이뤄지도록 ‘재난사태’를 선포했다.


강릉=김재희 jetti@donga.com / 속초=이인모 / 고성=김민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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