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 “엄마가 되고 싶어요” vs “강제로 아빠가 되고 싶지 않아요”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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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애리조나주 ‘냉동배아 출산권’ 허용에 시끌

미국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미국 내 불임클리닉에 냉동 상태로 보관된 배아는 60만 개가 넘는다. 체외에서 수정된 난자(위 이미지)를 영하 196도 이하의 액체질소로 얼려 보관한다. 사진 출처 CBS 홈페이지
미국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미국 내 불임클리닉에 냉동 상태로 보관된 배아는 60만 개가 넘는다. 체외에서 수정된 난자(위 이미지)를 영하 196도 이하의 액체질소로 얼려 보관한다. 사진 출처 CBS 홈페이지
“(냉동배아로 아이를 낳을 수 있다면) 그가 원하는 모든 걸 주겠다고 했어요.”(루비 토레스)

“이건 재깍거리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양육도 문제고, 아이가 커서 찾아오면 더 문제이니까요.”(존 터렐)

미국 애리조나주에 사는 루비 토레스와 존 터렐 부부는 지난해 3년간의 결혼 생활을 정리하기로 했다. 남편 터렐의 불륜이 원인이었다. 재산 분할은 순조로웠으나 부부가 함께 키우던 강아지 ‘에인절’과 3년 전 불임클리닉에서 만든 7개의 냉동배아를 두고 갈등이 생겼다. 부부는 결국 법정에 섰다.

유방암을 앓았던 아내 토레스는 “암이 자궁으로 전이될 가능성이 높아 냉동배아 없이는 아이를 가질 수 없는 상황”이라며 냉동배아를 이용한 출산을 희망했다. 남편 터렐은 “강요된 아빠가 되고 싶지 않다. 아이를 키우는 동안 전처(토레스)와 접촉하고 싶지도 않다”며 냉동배아 폐기를 주장했다.

○ 냉동배아에 대한 권리, 최초로 인정한 ‘토레스법’

애리조나주 1심 법원은 고민 끝에 “토레스가 배아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고, 냉동배아를 폐기해선 안 된다”며 ‘제3자 기증’ 결정을 내렸다. 즉, 토레스와 터렐의 아이가 어디선가 태어나도 부부 중 누구도 아이가 성년이 되기 전에는 볼 수 없게 된 것이다. 로니 코빈 스타이너 판사는 “배아는 사람은 아니지만 세포덩이와 잠재적으로 사람이 될 존재 사이에 있기 때문에 특별하다. 그걸 존중했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토레스는 “내 아이를 안아볼 수도 없고 평생 만날 수도 없게 한 결정”이라며 즉각 항소했다. 이 사건이 사회적 이슈가 되자 낸시 바토 애리조나주 상원의원(공화당)이 “냉동 배아가 삶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며 출산을 원하는 배우자에게 냉동배아를 제공하도록 하는 법안을 발의했고 주의회에서 가결됐다. 워싱턴포스트(WP)와 CBS 등은 “이른바 ‘토레스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이 7월 1일부터 시행됐다. 이에 따라 애리조나주에서는 출산을 원하는 배우자에게는 냉동배아를 넘겨줘야 한다”고 보도했다.

‘토레스법’은 미국 최초로 냉동배아로 아이를 낳으려는 배우자에게 배아에 대한 우선적 권리를 제공하는 길을 열어줬다. 다만 ‘원치 않은 부모’가 돼야 하는 상대 배우자(배아의 폐기를 원하는 배우자)는 배아에 대한 권리도 없지만 양육비 부담 등 부모로서의 의무도 지지 않는다. 현지 언론들은 “역설적이게도 ‘토레스법’은 소급 적용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재판이 진행 중인 토레스 사건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고 전했다.

지금까지 미국 법원은 대체적으로 냉동배아를 이용하길 원하지 않는 배우자의 손을 들어주는 편이었다. 일부 주에서는 냉동배아를 독립된 인격체로 인정하지 않고 법률적으로 ‘동산(動産)’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지난해 4월 뉴욕주 항소심법원은 냉동배아의 이용을 반대하는 남편의 손을 들어주고 냉동배아 폐기를 결정했다. 5년 전 냉동배아를 만들 때 부부가 “한쪽이 배아 사용에 대한 동의를 언제든지 철회할 수 있다”는 문서에 서명한 게 판단 근거였다. 의사이자 음악가인 미미 리와 실리콘밸리 투자회사의 중역인 스티븐 핀들리 이혼 소송에서도 같은 취지의 판결이 내려졌다. 캘리포니아주 1심 법원은 2015년 “아이의 출생에 참여하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전처와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의 양육 기간인) 18년간 접촉할 것이 두렵다”는 남편 핀들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5개의 배아를 폐기하도록 했다.

‘토레스법’은 이런 기존 판결들을 단박에 뒤집은 것이다.

미 보건복지부에 따르면 미국 내 불임클리닉에 보관된 냉동배아는 60만 개가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명확한 법 규정이 없어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도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애리조나주에서 ‘토레스법’이 시행되자마자 뜨거운 논란이 일고 있다. 지지자들은 “배아에 대한 파트너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률”이라고 옹호했지만 비판론자들은 “원치 않게 부모가 되도록 강요하는 법률”이라고 반발한다. 터렐의 변호인인 클라우디아 워크는 CBS와의 인터뷰에서 “법적으로는 부모가 아니라고 해도 ‘정서적 부모(emotional parents)’라는 건 그대로”라며 “자신의 생물학적, 유전적 아이를 (헤어진) 전 배우자가 키운다는 엄연한 사실을 ‘없는 일’처럼 여기며 지내는 건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 낙태 논쟁, 줄기세포 연구 문제로까지 확산

냉동배아 논쟁은 미국 내의 낙태를 둘러싼 정치 논쟁으로 번질 조짐을 보이고 있다. 낙태반대 단체들은 “불임치료를 준비하기 위해 배아를 만든 사람은 ‘자발적인 출산권(procreational rights)’을 행사한 것이며 이 결과 만들어진 배아는 한쪽의 변심에 의해 폐기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반면 낙태 합법화론자들은 “출산을 하지 않을 권리를 헌법이 보호하고 있다”며 “‘토레스법’은 배아를 독립된 생명체로 인정하고 인격권을 부여한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에, 낙태를 합법화한 기존 법률을 무력화시킬 수 있다”고 주장한다. 리치 본 미국변호사협회(ABA) 불임치료기술위원회 위원장은 워싱턴포스트와의 인터뷰에서 “‘토레스법’은 사실상 태어나지 않은 배아의 인간성(personhood)을 수립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며 “개인의 선택권을 제약하는 재앙이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미국 불임치료 학계에서는 ‘토레스법’ 시행으로 배아 기부가 줄어 파킨스병이나 알츠하이머병 치료 등에 중요한 줄기세포 연구를 위축시킬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불임치료가 일반화된 한국에서도 냉동배아의 소유권을 둘러싼 갈등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헌법재판소는 2010년 배아 생성자(정자 및 난자 제공자)가 배아의 관리 또는 처분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다고 결정했다. 하지만 냉동배아의 소유권에 대한 구체적인 법률은 마련돼 있지 않다. 부부가 배아를 냉동 보관하다가 이혼을 하면 그 소유권과 사용을 두고 다툼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다. 이계정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냉동배아 문제는 생명 존중의 관점에서 고려돼야 한다. 재화와 달리 언제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특수성도 감안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어 “현행법에서는 이혼 후 여성이 전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냉동배아를 이용해 출산한 경우 남편의 친권 포기를 인정받기 어렵다. 따라서 냉동배아를 둘러싼 다툼에 대비한 특별법 제정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뉴욕=박용 특파원 parky@donga.com
#냉동배아#토레스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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