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터 비키니]경상도 남성은 왜 표준어를 ‘거부’할까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1월 2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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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해 5월 8일 부산 서면에서 유세 중인 문재인 대통령. 부산=원대연 기자 yeon75@donga.com
대통령 선거를 하루 앞둔 지난해 5월 8일 부산 서면에서 유세 중인 문재인 대통령. 부산=원대연 기자 yeon75@donga.com
“부산에 오니까 참 기분이 윽수로 좋습니더.”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 시절이던 지난해 4월 22일 고향 부산을 찾아 이렇게 말했습니다. 부산에서만 고향이라 이렇게 사투리(방언)를 쓴 게 아닙니다. “싸우지 않는 정치”를 하겠다는 발언이 경상 방언 때문에 [사우지 않는 정치]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문 대통령만 그런 게 아닙니다. 영남 출신 정치인들은 사투리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필요에 따라 능숙하게 표준어를 쓰는 호남 출신 정치인과 대비되는 대목입니다.


MBC에서 정치 다큐멘터리 드라마 ‘격동 50년’을 연출한 오성수 PD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정치인들이 하는 말을 녹음해 잘 들어보면 영남 쪽 의원들은 의원총회 등 내부 회의부터 국회 상임위까지 대부분 걸쭉한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만, 호남 쪽 의원들은 사투리를 잘 쓰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물론 방언을 쓰는 게 절대 잘못은 아닙니다. 국립국어원에서 펴내는 ‘국민의 언어 의식 조사 보고서’ 가장 최신(2015년) 버전에 따르면 ‘평소에 사용하는 말’로 표준어를 꼽은 건 54.5%에 불과했습니다. 나머지 45.5%는 평소에 그 지역 방언으로 대화를 주고받는 겁니다.



경상도 사람들도 자녀는 표준어를 사용하길 원합니다. 같은 조사 참여자에게 ‘자녀가 지역 방언과 표준어를 모두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일 경우 어느 것을 사용하길 바라십니까’라고 묻자 경상권에서도 ‘표준어만 사용하기를 바란다’(20.9%)는 응답이 ‘지역 방언만 사용하기를 바란다’(1.8%)는 대답을 압도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경상도 부모들 스스로는 표준어 사용에 어려움을 느끼는 이유가 뭘까요? 정답은 표준어를 사용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아니라고요? 사회언어학적으로는 확실히 그렇습니다.

● 어쨌든 내 고향은 부산

용두산 공원에 자리 잡은 부산타워. 동아일보DB.
용두산 공원에 자리 잡은 부산타워. 동아일보DB.


정치인 출신 지역을 영·호남으로 나누면 김태정 전 법무부 장관은 재미있는 케이스입니다. 법조인 신상 정보를 모은 ‘한국법조인대관’을 보면 1997년 이전판에는 김 전 장관의 고향이 ‘부산’이라고 돼 있었습니다. 그가 ‘부산 사투리’를 썼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그런데 1998년 김대중(호남) 정권이 들어서자 고향이 전남 장흥군으로 바뀝니다.

김 전 장관이 거짓말을 한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김 전 정관은 검찰총장 시절이던 1997년 8월 18일에 나온 동아일보 인터뷰 기사에서 출신 지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습니다.

“아버님은 전남 장흥군 부산면 출신입니다. 우연히 부산(釜山)과 한자만 다르지(장흥군 부산면은 夫山) 한글은 같습니다. 그런데 아버님은 가난 때문에 젊은 시절 부산으로 이사, 사업을 시작했고, 나는 부산 영도구에서 태어났습니다.”



말하자면 자기가 태어난 곳을 고향이라고 할 때도 부산(釜山)이 맞았고, ‘아버지 고향이 진짜 고향’이라고 표현할 때도 부산(夫山)이 맞았던 겁니다.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분명 그렇지만 뭔가 수상한 냄새가 나지 않나요?

● 언어는 권력이다



김 전 장관의 고향 문제를 이해하려면 사회언어학에서 쓰는 ‘위세(prestige)’라는 개념을 도입할 필요가 있습니다. 윌리엄 라보프(사진)라는 언어학자가 고안한 이 개념은 의미 그대로 어떤 언어 형태와 다른 형태 사이에 존재하는 지위와 권세 차이를 나타냅니다.

방언을 예로 들자면 사실상 표준어라고 할 수 있는 ‘서울 사투리’가 다른 지역 방언보다 위세를 떨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보통 ‘위세형’ 언어를 선호합니다. 그러니 ‘나는 사투리를 계속 쓰더라도 자식아 너는 표준어를 쓰거라’하는 조사 결과가 나타나는 겁니다.

따라서 만약 표준어보다 더 위세 있는 언어 형태가 있다면 사람들은 그 쪽을 선호하게 될 겁니다. 네, 그게 바로 경상 방언입니다. 이번에는 이유가 간단합니다. 경상 방언이 ‘권력의 표준어’니까요. 역대 한국 대통령 12명 가운데 7명(58.3%)이 바로 영남 출신.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태어났지만 경북 포항시에서 자란 이명박 전 대통령까지 포함하면 전체 대통령 중 3분의 2가 경상 방언 구사자입니다.



그렇다 보니 경상 방언 구사자는 사투리를 ‘포기’해야 할 이유를 잘 느끼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반면 정치적으로 소외받은 호남인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알아서 고향 말씨를 숨겨야 했습니다. 그렇게 전국 곳곳에서 경상 방언은 넘쳤지만, 전라 방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라 방언이 복권(復權)된 현재는 어떨까요?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전라권 거주자는 같은 방언을 쓰는 사람과 대화할 때 ‘매우 편하고 친근하다’(48.7%)고 느끼는 이들이 제일 많았지만, 경상권에서는 ‘별 느낌이 없다’(51.9%)는 답변이 1위였습니다. 소외 받은 이들은 서로를 보듬지만 권력을 쥐고 사람에게는 권력이 당연해 보이기 때문일까요?

● 그 남학생은 왜?

tvN 연속극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하는 삼천포. 이 연속극에서 삼천포는 경남 사천시 출신이라는 설정이이지만 이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김성균 씨가 대구 출신이라 경남이 아니라 경북 사투리가 이따금 들렸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tvN 화면 캡처
tvN 연속극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하는 삼천포. 이 연속극에서 삼천포는 경남 사천시 출신이라는 설정이이지만 이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김성균 씨가 대구 출신이라 경남이 아니라 경북 사투리가 이따금 들렸다는 평가도 있습니다. tvN 화면 캡처


사실 정치인만 그런 게 아닙니다. 새 학기가 되면 분명 서울로 진학한 대학 신입생 가운데 발표 시간에 방언 때문에 얼굴을 붉히는 ‘경상도 출신’ 남학생이 나올 겁니다.

네, 남학생이라고 썼습니다. 분명 남학생이 여학생보다 사투리가 더 심합니다. 심지어 여학생 중에는 먼저 고향을 묻지 않으면 영남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기 힘든 경우도 많지만, 남학생은 주변에 경상 방언을 전파하는 사례도 많습니다.

경상 방언 구사자는 이 표현을 서로 다르게 소리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경상 방언에 성조(聲調)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성조 때문에 표준어와 경상 방언 사이가 언어학적으로 가장 멀고, 그로 인해 경상 방언구사자가 표준어 사용에 애를 먹는다고 보기도 합니다. 인터넷 캡처
경상 방언 구사자는 이 표현을 서로 다르게 소리 낼 수 있다고 합니다. 경상 방언에 성조(聲調)가 남아 있다는 증거입니다. 학자에 따라서는 이 성조 때문에 표준어와 경상 방언 사이가 언어학적으로 가장 멀고, 그로 인해 경상 방언구사자가 표준어 사용에 애를 먹는다고 보기도 합니다. 인터넷 캡처


실제 연구 결과를 봐도 경상 지역 여성이 남성보다 표준어에 더 가까운 발음을 구사합니다. 경상 방언 특징 가운데 하나는 홀소리(모음) ‘ㅓ’와 ‘ㅡ’ 사이 구분이 약하다는 것. 경상 방언 구사자를 흉내 낼 때 ‘음악’을 [어막]처럼 소리 내는 것 알고 계시죠?

고려대 연구진은 이런 차이를 알아보려고 서울과 대구에 거주하는 20대 남녀에게 ‘어린’, ‘언약’, ‘얼음’, ‘은행’, ‘은혜’, ‘을일(乙日)’ 같은 낱말을 발음하도록 한 뒤 지역에 따라 ㅓ와 ㅡ가 어떤 주파수로 나타나는지 분석했습니다. 그러니까 ㅓ와 ㅡ 사이 주파수 차이가 크면 클수록 두 소리를 잘 구분해 발음하는 겁니다.

그 결과 대구에 사는 20대 남성은 이 차이가 234.6로 여성(580.2)의 절반도 되지 않았습니다. 남성이 여성보다 이 소리를 잘 구분하지 못하는 겁니다. 서울 지역하고 비교하면 남성 쪽은 서울과 대구 차이가 2.33배로 여성(1.21배)보다 컸습니다. 대구 지역 여성이 남성보다 서울 지역 발음과 더 비슷한 소리를 냈다는 뜻입니다. (좀 더 자세한 내용은 논문 ‘대구 방언 20대 화자의 단모음 실현 양상에 나타난 표준어 지향성의 성별적 차이’를 참고하시면 됩니다.)



대구만 그런 건 아니고 경상 방언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물론 한국어만 그런 것도 아닙니다. 사회언어학적으로 여성이 남성보다 표준어에 더 가까운 언어 형태를 쓰는 건 아주 일반적인 현상입니다. 표준어뿐 아니라 모든 ‘표준형’에 있어 그렇습니다.

월트 울프람이라는 사회언어학자는 1969년 미국 디트로이트에 사는 흑인을 대상으로 홀소리 뒤에 [r]를 얼마나 발음하는지 계층과 성별에 따라 조사했습니다. 이 때는 홀소리 뒤에 [r]를 발음하는 게 표준형입니다.



조사 결과 모든 계층에 걸쳐 여성이 남성보다 [r]를 생략하는 비율이 낮았습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여성이 모든 계층에 걸쳐서 표준형을 사용하는 비율이 더 높았던 겁니다. (위 표에서 중산층은 ‘Middle Class’, 노동계층은 ‘Working Class’를 번역한 표현입니다.)



왜 이렇게 남성은 비표준형을 선호할까요? 영국 언어학자 피터 트루질(사진)은 “비표준형은 ‘남성성’ 같은 특정 집단의 가치를 부각시켜 유대감을 표현하는 수단”이라고 풀이했습니다. 말이 어렵죠? 좀 더 풀이해 설명하면 비표준형은 ‘거친’ 느낌을 풍기고 이 때문에 남성 화자에게 좀더 매력적으로 비친다는 뜻입니다. 이 때문에 남성은 표준어 사용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거꾸로 여성은 이런 이미지를 피하려 하기 때문에 표준형을 선호합니다.


● 사투리 고쳐야 하나?


1987년 대통령 선거 유세 때 김영삼 전 대통령. 경남 거제시 출신인 그는 당시 “군정을 확실히 종식시키겠다”고 강조하려 했지만 ‘확실히’가 [학실히]처럼 들려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DB
1987년 대통령 선거 유세 때 김영삼 전 대통령. 경남 거제시 출신인 그는 당시 “군정을 확실히 종식시키겠다”고 강조하려 했지만 ‘확실히’가 [학실히]처럼 들려 유행어가 되기도 했습니다. 동아일보DB


그렇게 영남 출신 남성이 ‘학실히’ 가장 표준어와 거리가 먼 사람이 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지역 방언을 쓰는 게 절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고쳐야 할 건 사투리가 아니라 ‘사투리는 수준이 낮은 언어’라는 인식입니다.

그래도 언어 의식 조사에 따르면 ‘표준어든 지역 방언이든 어느 것을 사용해도 무방하다’(31.4%)는 의견보다 ‘때와 장소에 따라 표준어와 지역 방언을 구분하여 사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39.0%)는 답변이 더 많았습니다.

그러니 지역 방언이 ‘틀린 언어’는 아니라고 해도 ‘다른 언어’로서 표준어를 배울 필요 정도는 있다고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냥 다른 사람이 알아들을 수 있는 수준으로 말입니다. 말이라는 건 자기 생각이나 느낌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려고 쓰는 거고, 지역 방언보다 표준어를 쓸 때 그 말을 오해 없이 이해하는 사람이 더 많을 테니까요.

황규인 기자 kin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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