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정성은]어느 외주 제작사 PD의 죽음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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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보근 기자 paranwon@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김보근 기자 paranwon@donga.com
정성은 프리랜서 VJ
정성은 프리랜서 VJ
최근 드라마PD 시험을 보았다. 시험엔 이런 문제가 나왔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뭐라고 생각하는가.’ 순간 얼마 전 읽은 소설 ‘마티네의 끝에서’에서 주인공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인간은 바꿀 수 있는 것은 미래뿐이라고 믿고 있어요. 하지만 실제로는 미래가 과거를 바꾸고 있습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고? 책에서 나온 예시는 이러했다.

요코에겐 정원석에 관한 소중한 기억이 있었다. 어렸을 적, 할머니 집에 놀러 갈 때마다 소꿉놀이를 했던 장소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할머니가 아흔이 되던 해, 정원석에 머리를 부딪혀 돌아가시자 더 이상 그 돌멩이를 아름답게 추억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게 과거는, 다가오는 미래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아주 섬세한 것이었다. 거기에 착안해 답안을 써 내려갔다. ‘드라마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과거를 바꾸는 힘입니다.’

특별할 것 없던 나의 20대도 ‘응답하라 1994’를 보고 나니 제법 반짝여 보였다. 부품같이 여겨졌던 회사생활도 ‘미생’을 볼 때면 새로운 의미로 다가왔다. ‘당신의 삶은 당신이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는 만큼, 딱 그만큼의 의미를 지닌다’는 헤세의 말처럼 내 삶엔 끊임없는 의미 부여가 필요했고, 좋은 이야기는 그것을 가능케 했다.

그렇게 시험을 마무리했다. 과거를 바꿀 수 있다는 말도 쓰다 보니 믿게 된 것 같았다. 하지만 시험장을 나와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나의 주장은 무색해졌다. 세상엔 바꿀 수 없는 과거가 얼마나 많은가. “아직도 가슴이 아프고 그들이 쉽게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 곧 우리의 모습일 수도 있다는 자각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휴대전화 전원을 켜자마자 제일 먼저 본 건 선배가 올린 글이었다. 한때 몸담았던 다큐멘터리 외주 제작사의 대표였다. 생전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안 하던 분이 무슨 일일까? 그것은 어느 독립 PD의 안타까운 죽음에 관한 이야기였다.

지난달 14일 EBS ‘다큐프라임: 야수와 방주’ 다큐멘터리 제작을 위해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촬영 중이던 독립 PD 두 명이 교통사고로 숨졌다. 사인은 상대 차의 졸음운전이었다. 가로등도 없는 낯선 오지에서 운전사도, 현지 코디네이터도 동행하지 않고 PD가 운전대를 잡았던 이유는 부족한 제작비 때문이었다. 외주 제작사에서 카메라 감독이 없어진 지는 오래되었다. 제작비 때문에 대부분 PD가 모두 촬영을 한다. 미디어 환경이 변하며 제작단가는 높아지고 있지만 ‘오랜 시간 기다려야만 얻을 수 있는’ 다큐라는 장르에선 기간 대비 너무나 열악할 수밖에 없다. 어떻게든 제작비는 깎되 저작권은 챙기려는 방송사의 압박에 외주 제작사는 늘 ‘을’이었다. 고인이 된 박환성 PD는 남아공 촬영을 떠나기 직전까지 이 문제를 공론화시켰고 누구보다 치열하게 싸웠다. 그 누구도 앞장서지 않는 일에 용기 낸 그였기에 동료들은 더욱 비통해했다.

슬픔에 연대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다 글을 써보기로 했다. 외주 제작사에서 10개월 동안 조연출 생활을 했던 막내가 지켜본 열악한 방송 시스템에 대해서. 하지만 그 어떤 말도 쓸 수 없었다. 나는 거기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다.

버틴 자만이 얻을 수 있는 그 무엇을 선배들은 알기에 계속해 나가는 것일 테다. 부디 그 과정이 너무 힘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고 박환성 김광일 PD님의 명복을 빕니다. 그 먼 곳까지 가셔서 담으려고 하셨던 이야기가 너무나 궁금합니다.
 
정성은 프리랜서 VJ
#ebs 독립 pd 교통사고 사망#박환성#김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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