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근배의 神品名詩]청화백자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6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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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청화 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백자 청화 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
청화백자 ―김 정 인(1950∼ )

어린 대나무와 등짝 굽은 소나무가
절대 고요를 가두고 합방하고 있다
허공을 바닥부터 꾹꾹 눌러놓은 항아리는
들끓던 제 무게를 쓸어 담고
배 한껏 부풀어 있는데
무엇을 버티면서 여기까지 왔나

바람이 불면 댓잎 서걱이는 소리
어금니 꽉 깨문 솔방울 벌어지는 소리
소나무의 옹이까지 끌어안은 항아리는
저 혼자 출렁이고 저 혼자 가라앉을 줄 안다
내가 가두어 놓은 붉은 죄가
시간의 자궁에서 언젠가는 닫힐 줄 알면서도
기억되기를 바라며 어제를 새겨 입안에 파묻었다

누가 어둠을 치대고 밟아 굽다가 깨어버리고
다시금 새 하늘을 열어 길을 내었나
나무와 함께 서서 긴 고백을 지우고 있나
촉수 곤두세운 정신이
영겁을 기도한 손길 하나 붙들고
천년 세월 돌이 되어 앉아 있다


 
어디서 오는 솔바람, 대바람인가. “만고상청하리라”고 충절을 읊은 성삼문 같은 봉래산 제일봉의 낙락장송인가, 지리산 골짜기의 대숲인가. 고려청자 매병이 조선으로 넘어와 비로소 백자왕국을 빚어 올린 ‘백자 청화 홍치2년명 송죽문 항아리(白磁靑畵弘治二年銘松竹文 壺·국보 176호)’는 이름도 길거니와 48.7cm의 훤칠한 키에 벌어진 어깨며 흘러내린 곡선이 가절(佳絶)한 데다가 흰 살결 위에 소나무와 대나무가 서로 얼싸 감싸도는 코발트 그림이 아예 조선의 넋을 다 내뿜고 있는 거라. 명나라 연호 홍치 2년(1489년)까지 주둥이 안쪽에 쓰여 있어 ‘해마다 사옹원(司饔院)의 관리가 화원과 함께 임금님의 그릇을 감조하였다’는 ‘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 비추어 필시 궁중에서 술단지나 꽃꽂이용으로 쓰였을 것이다.

그러나 이 항아리는 화엄사에 전해 오던 것을 두 차례나 도난당했다가 되찾아 지금은 동국대 박물관에 옮겨졌다.

종이와 달리 초벌구이에 세필로 그리기도 어렵거니와 유약을 입혀 1000도 넘는 불길에서 이렇듯 잘생긴 송죽화 한 폭이 살아났으니 어흠! 고려청자 앞에 조선백자가 뽐낼 만도 하지.

시인은 ‘촉수 곤두세운 정신이/영겁을 기도한 손길 하나 붙들고/천년 세월 돌이 되어 앉아 있다’며 충절의 솔바람 대바람 소리를 삶에 찌든 우리네 가슴속에 불어넣어 주고 있다.
 
이근배 시인·신성대 교수
#청화백자#김정인#항아리#동국대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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