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꿈꾼 날 건져올린 백제 최후의 걸작 ‘금동대향로’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2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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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2회> 신광섭 울산박물관장

신광섭 울산박물관장이 15일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된 ‘백제금동대향로’를 보며 1993년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향로 위쪽의 산봉우리 부분을 평면에 펼친 전개도(맨아래 그림)에 각양각색의 신선과 동물들이 보인다. 부여=홍진환 기자 jean@donga.com
“여보, 간밤에 용꿈을 꿨지 뭐예요.”

“당신 늦둥이라도 낳으려는가. 하하.”

1993년 12월 12일 오후 8시 반. 충남 부여군 부여읍 능산리 절터(능산리 사지) 발굴 현장에 있던 신광섭 당시 국립부여박물관장(65·현 울산박물관장)은 이날 아침 출근길에 아내와 나눈 대화가 불현듯 떠올랐다.

바로 자신의 눈앞에서 거대한 용이 온몸을 비틀며 하늘로 날아오르고 있었다. 용의 아가리 위로 연꽃이 피고 다시 그 위로 첩첩산중의 삼라만상(森羅萬象)이 펼쳐졌다. 국보 제287호 백제금동대향로(百濟金銅大香爐)가 1500년 만에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었다.

○ 신선 세계 묘사한 백제의 특급 문화재

백제금동대향로는 지금껏 발굴된 백제 문화재 가운데 가장 걸작으로 손꼽힌다. 얼마나 귀한지 국외 반출 금지 문화재로 지정돼 지금껏 한번도 한반도를 벗어난 적이 없다. 능산리 절터에서 출토된 향로는 백제 후기 역사와 문화에 대한 해석을 근본적으로 바꿔 놓았다.

높이 61.8cm, 무게 11.8kg에 이르는 이 대형 향로는 중국의 박산향로를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예술성이나 규모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꼭대기에 봉황이 달린 향로 뚜껑에는 23개의 산이 다섯 겹에 걸쳐 이어져 있다. 봉우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활을 쏘는 무사부터 머리를 감는 선인(仙人), 각양의 악기를 연주하는 악사(樂士)들까지 총 18명의 인물이 세밀하게 묘사돼 있다. 이뿐인가. 호랑이와 사슴, 사자, 반인반수(半人半獸) 등 65마리의 온갖 동물이 어슬렁거리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광섭이 꼽는 백미는 향로 전체를 밑에서 떠받치고 있는 용이다. “역동적인 용틀임은 누가 봐도 힘이 넘쳐요. 특히 용의 입에서 피어오르는 연꽃은 ‘연화화생(蓮華化生·연꽃에서 만물이 탄생한다는 세계관)’을 절묘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1993년 12월 12일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직후의 모습(맨 위). 신광섭 관장(맨 아래)과 조사원들이 막 꺼내온 향로의 이물질을 닦아내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1993년 12월 12일 충남 부여군 능산리 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직후의 모습(맨 위). 신광섭 관장(맨 아래)과 조사원들이 막 꺼내온 향로의 이물질을 닦아내고 있다. 국립부여박물관 제공

○ 1500년 깊은 어둠을 뚫고 다시 세상으로

향로가 출토된 과정은 용꿈만큼이나 드라마틱하다. 발굴팀은 당시 신광섭을 비롯해 부여박물관 학예연구실장 김정완(현 국립대구박물관장), 학예연구사 김종만(현 국립공주박물관장) 등으로 구성됐다. 부여군이 나성(羅城)과 능산리 고분 사이에 관람객을 위한 주차장을 짓기로 함에 따라 1993년 마지막 발굴이 시작됐다. 여건상 예산이 부족한 데다 시간에 쫓겨 자칫 능산리 절터는 영원히 사라질 뻔했다. 부여 토박이인 신광섭은 예부터 이곳에서 기와가 대량으로 출토된 사실에 주목했다. 다음은 그의 회고. “왕릉(능산리 고분)과 나성에 인접한 곳이라면 뭔가 중요한 시설이 있을 것 같다는 감이 왔어요.”

신광섭은 박물관계에서 ‘불도저’로 통한다. 판단이 서면 과감하게 목표를 향해 돌진한다. 그는 곧바로 서울로 올라가 문화재관리국(현 문화재청) 노태섭 기념물과장(전 문화재청장)을 만났다. 발굴 현장을 많이 다녀본 노태섭도 남다른 감을 갖고 있었다. 과장 전결로 2000만 원의 예산 지원이 즉시 이뤄졌다. 신광섭은 한발 더 나갔다. 당초 시굴(발굴에 앞서 유구의 성격을 파악하기 위해 일부만 파보는 것)로만 발굴 허가가 났지만 과감히 절터 서쪽 건물터(나중에 공방 터로 밝혀짐)에 대한 전면 발굴에 나섰다. 발굴 성과가 제때 나오지 않으면 주차장 공사가 강행될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하늘이 도왔어요. 여기서 향로가 나올 줄 누가 상상이라도 했겠습니까?”

1993년 12월 12일 오후 4시. 현장을 지휘한 학예연구사 김종만이 향로를 처음 발견했다. 절터 서쪽 공방터 안 물웅덩이에서 금속편이 살짝 노출된 것이다. 오래전 지붕이 무너져 내려 너비 90cm, 깊이 50cm의 웅덩이에는 기와 조각과 물이 가득 차 있었다. 조사원들은 인근에서 나온 금동광배의 조각으로 알았다. 김종만의 보고를 받은 신광섭이 곧 현장으로 달려왔다. 그는 인부들을 모두 퇴근시킨 뒤 엎드린 자세로 손수 기와를 하나씩 빼냈다. 웅덩이 안에서 솟구치는 물을 스펀지로 계속 닦아 내야 했다. “유물이 다칠까 봐 몇 시간 동안 맨손으로 파냈어요. 추운 겨울 저녁에 연신 손을 찬물에 담갔더니 점점 감각이 없어집디다.” 오후 8시 반. 3시간여의 작업 끝에 드디어 향로 뚜껑과 받침의 윤곽이 모두 드러났다.

고고학계는 백제 말기인 사비시대에도 문화예술이 고도로 융성한 사실을 금동대향로가 보여줬다고 평가한다. 종래는 백제의 공예 기법이 무령왕릉이 조성된 웅진시대에 절정에 달한 뒤 사비시대부터 점차 쇠퇴한 것으로 봤다. 특히 금동대향로를 중국 남조에서 수입한 것으로 봤던 견해는 점차 힘을 잃고 있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는 “2007년과 2009년 부여 왕흥사지와 익산 미륵사지에서 각각 출토된 사리장엄(舍利莊嚴·사리를 봉안한 공예품)은 백제가 금동대향로와 같은 고도의 예술품을 제작할 수 있는 역량을 충분히 갖췄음을 뒷받침하고 있다”고 말했다.

부여=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백제#금동대향로#신광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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