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프랜시스 베이컨, 덧칠없는 그의 ‘그림세계’를 만나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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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데이비드 실베스터 지음/주은정 옮김·344쪽/1만6000원·디자인하우스

1976년작 ‘자화상을 위한 습작 3점’. 베이컨은 “본래 맥락으로부터 떼어내 인위적 구조 속에서 재구성한, 덜 사실적인 듯 그린 그림이 훨씬 더 실체와 유사해 보인다”고 했다. 사진 출처 francis-bacon.com
1976년작 ‘자화상을 위한 습작 3점’. 베이컨은 “본래 맥락으로부터 떼어내 인위적 구조 속에서 재구성한, 덜 사실적인 듯 그린 그림이 훨씬 더 실체와 유사해 보인다”고 했다. 사진 출처 francis-bacon.com
뒤표지를 넘겨 닫는 순간까지 리뷰 기사의 첫 한 줄조차 떠오르지 않을 때가 간혹 있다. 이 책은 그 대척점이다. 한 줄 한 줄 허투루 넘기기 어렵다. 읽다 보니 어느 샌가 노트를 펴고 이런저런 낙서를 끼적이고 있다. 무게 잡고 기술한 학술서적을 닮은 것도 아니다. “이류 공립학교를 겨우 1년 다니고 퇴학당한” 이와의 두런두런 인터뷰. 대상은 영국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1909∼1992)이다.

표지 하단에 큼직하게 ‘세계에서 가장 비싼 그림을 그린 영국 최고의 표현주의 화가’라고 박아놓았다. ‘영국 최고’는 어불성설. 현재까지 결과가 공표된 미술품 경매를 통틀어 베이컨의 1969년작 ‘루치안 프로이트의 습작 3점’이 최고가 기록(1억4240만 달러·2013년 11월 12일)을 보유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갤러리에서 베이컨의 작품을 거듭 돌아보게 되는 건 높은 작품 가격 때문일까. 그는 “다른 사람들이 내 작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무관심하다”고 말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립니다. 그것 말고 달리 뭘 위해 그리겠습니까? 구경하는 사람을 위한 작업은 도대체 어떻게 할 수 있는 겁니까? 보는 사람이 원하는 게 무엇일지 상상하는 건가요? 다른 사람이 내 작품을 좋아해 주는 게 언제나 놀랍습니다.”

1962년작 ‘십자가 책형을 위한 습작 3점’. 베이컨은 “엄청난 음주와 숙취 속에서 작업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고 했다.
1962년작 ‘십자가 책형을 위한 습작 3점’. 베이컨은 “엄청난 음주와 숙취 속에서 작업한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라고 했다.
2001년 사망한 저자는 1993년 평론가로는 처음으로 이탈리아 베니스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받은 인물이다. 베이컨과 막역한 사이였음은 굳이 설명 없이도 대화 내용으로 짐작이 간다. 딱딱한 경어체로 구성한 번역을 좀 더 친근한 어투로 바꿔 읽고 싶어진다.

“있잖아, 사실 런던 테이트에 있는 에릭 홀 초상은 ‘먼지’로 그린 거야. 그 사람 옷에 물감은 한 방울도 쓰지 않았다고. 바닥 먼지를 쓸어 모은 다음 아주 얇게 발라서 얻은 회색이지. 모직 정장 보풀을 어떻게 표현할까 고민하다가 떠오른 생각이었어. 그런데 미술관은 그 작품 재료가 먼지인 걸 알리길 원하지 않을걸?”

최근 국내 개봉한 영화 ‘미스터 터너’에서 주인공 화가 터너는 캔버스에 이따금 가래침을 뱉으며 물감과 섞어 바른다. 작품 설명 어디에도 ‘캔버스에 수채와 약간의 가래침’이란 문구는 없다. 화가가 그려내려 하는 것, 미술관이 보여주려 하는 것, 관람객이 들여다보려 하는 것의 간극에 대한 상념이 부질없이 돌아간다.

화가와 평론가가 맥주잔을 부딪치며 나눈 대화를 곁에 앉아 고맙게 엿듣는 기분. 답변마다 한구석 망설임도 없다. 확신에 찬 강변이라기보다는 눈앞의 현실과 자신의 작업에 대한 강고한 머뭇거림을 꾸밈없이 토해낸 말 묶음이다.

“미술에서는 모든 것이 잔인해 보입니다. 실재가 잔인하기 때문이죠. 아마도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추상 미술을 좋아하는 걸 겁니다. 추상에는 잔인함이 보이지 않으니까요.”

한국어판은 1975, 1980, 1987년 인터뷰 책을 묶었다. 원제는 ‘Interviews with Francis Bacon’. 베이컨은 번역 제목을 맘에 들어 했을까.

“작품에 대한 오독에 화가 나지는 않습니다. 그러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가능하면 특색 없는 제목을 유지하고 싶습니다. 제목이 이미지 안에서 거짓말을 하기 때문입니다. 나도 내 작업의 상당 부분을 해석하지 못하는걸요. 나는 작품을 통해 뭔가 ‘말하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뭔가를 ‘하려’ 하는 겁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프랜시스 베이컨#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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