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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굶주림 해결한 ‘라면의 代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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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 굶주림 해결한 ‘라면의 代父’

김유영기자 입력 2014-07-12 03:00수정 2014-07-12 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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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 별세
고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은 ‘국민들이 배를 곯지 않게 하겠다’는 뜻에서 1961년 삼양식품을 창업했다. 삼양식품 제공
1950년대 말의 어느 날 서울 남대문시장. 동방생명(현 삼성생명) 부사장이던 전중윤은 미군부대 음식찌꺼기로 만든 5원짜리 ‘꿀꿀이죽’을 사먹기 위해 수십 명이 줄을 서 있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순간 일본 출장 때 맛본 라면이 떠올랐다. ‘배고픈 우리 국민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겠다’는 결심이 선 순간이었다.

그는 직접 식품회사를 만들기로 하고 1961년 삼양식품을 창업했다. 이후 상공부를 설득해 어렵사리 설비투자비 5만 달러를 지원받았다. 곧바로 일본의 묘조(明星)식품을 찾아간 그는 “한국의 식량 사정이 어려워 라면을 보급해야 한다”고 끈질기게 기술 전수를 부탁했다. 25일간 공장에서 살다시피 하며 라면제조 공정을 익혔고 라면기계 2대도 도입하기로 했다. 부단한 노력 끝에 마침내 1963년 9월 15일 삼양라면이 탄생했다.

국내 최초로 라면을 만든 전중윤 삼양식품 명예회장이 10일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5세.


처음 생산된 삼양라면 한 개(100g)의 가격은 10원. 자장면 한 그릇이 20∼30원, 김치찌개가 30원 하던 시절이었다. 전 명예회장은 “애국하는 마음으로 일부러 가격을 낮게 책정했다”고 회고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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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쌀과 보리가 주식이던 당시 일반 소비자들은 라면을 낯설어했다. 전 명예회장은 1년 동안 공원 극장에서 무료 시식회를 열어 라면을 홍보했다. 이런 노력과 1965년 롯데공업(농심의 전신)이 라면사업에 뛰어든 것을 계기로 차차 라면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라면은 곧 ‘제2의 쌀’이 됐다. 삼양은 생산 3년 만인 1966년 당시 충청남북도의 쌀 생산량과 맞먹는 양의 라면을 출고했다. 1969년부터는 베트남을 비롯한 해외에 수출을 시작했다.

삼양식품이 1967년 출시한 ‘미니라면’(왼쪽)과 1970년 내놓은 ‘삼양 쇠고기면’은 국내 라면시장의 성장에 큰 기여를 했다. 삼양식품 제공
전 명예회장의 ‘라면 열정’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는 쇠고기라면에 들어가는 수프에 ‘진짜 쇠고기’를 넣기 위해 1972년 강원 평창군의 1980만 m²(약 600만 평) 부지에 대관령 삼양목장을 조성해 소를 길렀다. 이후 한국야쿠르트(1983년)와 빙그레(1986년), 오뚜기(1987년)가 잇달아 라면사업을 시작해 시장이 급팽창했고, 1988년 삼양라면은 시장점유율 60%를 차지하는 1위 기업이 됐다.

하지만 1989년 검찰이 삼양식품의 라면 제조에 쓰이는 쇠기름이 ‘공업용 우지(牛脂)’에서 추출된 것이라고 발표하면서 시장점유율이 10%대로 곤두박질쳤다. 공장 기계가 멈춰서고 임직원 1000여 명이 회사를 떠나야 했다. 1997년 대법원의 무죄 판결로 누명을 벗었지만 삼양식품은 1998년 외환위기 때 부도 위기를 맞았다. 결국 화의신청을 했으나 삼양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2005년 경영을 정상화했다.

전 명예회장은 장남인 전인장 현 삼양식품 회장에게 경영권을 물려줄 때인 2010년까지 노익장을 과시했다. 지난해 5월까지 매달 한두 차례씩 대관령 삼양목장을 찾아 목장을 체험형 테마파크로 만드는 방안을 모색하는 등 애정을 쏟았다.

빈소는 서울아산병원 20호실, 영결식은 14일 오전 9시에 열린다. 장지는 대관령 삼양목장 내 선영. 02-940-3000

김유영 기자 abc@donga.com
#전중윤#상양식품#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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