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희 칼럼]섹시 환상에 익사한 권력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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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희 논설위원
정성희 논설위원
‘깃털 같은 권력 나부랭이 잡았다고 함부로 주둥아리를 놀리는데? 정치창녀? 창녀보다도 못난 놈.’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으로부터 ‘정치적 창녀’ 소리를 들었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 씨가 대통령직인수위 시절 윤 씨를 지목해 페이스북에 남긴 글이다. 지금에 와서는 ‘창녀 공방’보다도 ‘깃털 같은 권력’이란 대목에 눈길이 간다. 한때 권력의 정점에 서봤던 김 씨가 윤 씨의 말로를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윤 씨는 권부의 핵심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실명으로 비판하는 칼럼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을 비롯해 수많은 정치인과 권력자가 그의 펜 끝에서 굴욕을 당했다. 그런 그가 권력 핵심으로 들어가더니 자신이 비판했던 사람들의 잘못은 티끌처럼 보일 정도의 막장드라마를 연출하며 추락했다.

그는 왜 대통령 방미라는 중차대한 시기에 성추행이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저질렀을까. 평소 호색한이었을까. 이국의 흥취에 젖어 하룻밤 일탈을 꿈꾸었을까.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권력자의 머릿속에는 일종의 ‘성적 특권의식’이 존재한다. 권력이 클수록 더욱 그렇다. 영웅은 호색(好色)이고 임금은 무치(無恥·부끄러움이 없다는 뜻)라 했으니 옛사람들도 권력의 이런 속성을 간파했던 셈이다. 벼락출세한 윤 씨에게도 결국은 권력이 문제였다.

권력의 특징에는 스타의식도 있다. 나는 선택받고 매력 있는 존재이므로 모든 사람이 나를 좋아하고 숭배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게 스타의식이다. 대중의 인기를 먹고사는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이 스타의식에 빠지기 쉽지만 기업 지배구조 평가업체인 GMI레이팅스의 폴 호그슨에 따르면 정치인이나 고위관료, 기업 최고경영자(CEO) 같은 사람도 예외는 아니다. 그래서 그는 “권력은 최음제”라고 말한다. 권력을 잡게 되면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진다고 한다. 장관을 지낸 한 인사는 “가볍게 한 이야기가 다음 날이면 보고서로 책상에 올라와 있다”고 말했다. 이런 권력의 맛에 중독되면 세상에 안 되는 일이 없고 여자들조차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착각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많은 이가 박근혜 대통령의 ‘윤창중 발탁’을 우려했지만 윤 씨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고 한다. 그는 오히려 “여기자들이 자꾸 전화해 귀찮게 한다”고 ‘불평 아닌 불평’을 하는 등 자신의 힘을 즐기는 눈치였다고 한다. 왜 하필 기자가 아니고 여기자인가. 청와대 대변인인 그에게 기자들이 접근하는 것은 당연한데 그는 왜 여기자만 의식했을까. 혹여 여기자가 자주 전화했다고 해도 취재 목적일 터인데 그는 자신이 매력 있다고 생각했던 걸까. 아무리 술김이라지만 갓 스물을 넘은 인턴 여대생을 어찌해 보겠다고 한 의식의 기저에는 이런 왜곡된 스타의식이 깔려 있었음 직하다.

권력은 ‘숨겨진 욕망’의 빗장을 풀게 한다. 권력자가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는 부단한 노력과 자기절제, 철저한 주변관리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단 정점에 서면 그동안 참았던 욕망을 분출하고 그간의 고통을 한꺼번에 보상받고 싶어 한다. 힘겹게 권좌에 올라선 사람들이 어처구니없는 기행으로 추락하는 것은 권력이 욕망의 고삐를 풀어 놓기 때문이다. 전쟁영웅 출신인 미국 중앙정보국(CIA) 국장 데이비드 퍼트레이어스의 불륜 스캔들이나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의 호텔 여종업원 강제추행이 대표적이다.

윤 씨의 행동은 이들과 비교해도 부끄럽다. 상대 여성이 권력관계에서 취약해도 너무 취약한 인턴에 불과하기 때문에 그렇다. 권력을 누구보다 앞장서 비판했던 그는 권력에 너무 빨리 취했다. 권력에 무장해제당한 듯한 그에게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은 권력에 대한 날카로운 갈망의 다른 이름이었는지 모른다.

정성희 논설위원 shchu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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