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인균의 우울증 이기기]내 불행은 엄마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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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3년 3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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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방송 매체에서 인터뷰를 요청받으면 일단 주저하게 된다. TV 화면으로 보면 아마도 더 얼굴이 커 보이기 때문인지, 어김없이 어머니께 전화와 문자가 오기 때문이다. 죄 없는 아내는 한참 동안 어머니로부터, 밤에 간식을 주지 말라는 훈계를 듣는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의 과체중에는 어머니께서 기여하신 바가 있다. 어렸을 때 받은 칭찬과 훈계는 성인이 되어서까지 행동과 선택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알려져 있다. 입에 넣어 주시는 음식을 맛있게 받아먹었을 때 짓던 어머니의 그 흐뭇한 표정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이러니 나는 음식을 먹을 때 포만이 주는 만족감에 더해 무의식적으로 어머니에게 칭찬받을 거라는 행복감을 느끼고 있음이 분명하다.

주변을 보면 이런 기대감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적성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경우도 있다. 환자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임상의사로 살아가는 것이 적성에 맞을 것 같다 싶은 전공의들도, 굳이 박사 학위를 받아 꼭 의대 교수가 되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혀 있는 경우를 보았다.

진료실에서 만난 우울증 환자들에게서도 이런 그늘을 볼 때가 있다. 20대 후반 여성인 A 씨는 우울감과 늘 불안한 마음을 호소했다. 그의 어머니는 매우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었다. 자기관리가 뛰어나 살림도 잘 꾸리고 아이들 뒷바라지에도 뒤지지 않았으며 외모도 항상 단정하게 관리했다.

이런 ‘완벽한’ 어머니에게 A 씨는 시원한 칭찬을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너는 머리는 똑똑한데 왜 이러고 있니” “이 정도로 만족하고 살면 안 된다” 등의 말을 듣고 자랐다.

A 씨는 자신이 재미를 느끼는 직업을 가지고 별 부족함 없이 살고 있지만 속마음에는 항상 자기 자신에 대해 싫어하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무언가 늘 잘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갖는 것이다. 부모님의 높은 기대와 가치가 마음속에 내재화되어, 늘 못 미친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까닭이다.

그렇다면 자녀에게 생기는 우울증은 엄마 탓일까? 40대 초반 여성인 B 씨는 우울증을 술로 달래다 술 문제로 남편과 큰 다툼을 벌였다. 결국 친정어머니 손에 이끌려 진료실을 찾게 되었다.

B 씨는 맞벌이로 늘 바빴던 친정 엄마가 집에 없어 혼자서 밥을 먹어야 했던 청소년 시절을 얘기하며 자신이 우울증으로 고통받는 것은 엄마 때문이라고 울먹였다. 그런 딸 옆에서 B 씨의 어머니는 같이 눈물을 흘리며 “미안하다, 미안하다” 안절부절못하며 가슴 아파했다.

B 씨를 보며 안타깝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답답함도 느꼈다. 우선 설령 부모가 과거에 미숙하고 잘못한 부분이 있었다 하더라도 현재 시점에서 이를 바꿀 수는 없다. 내 불행을 부모 탓으로 돌리면 당장은 시원하겠지만 곧 분노와 죄책감만 오가게 될 뿐 현재 상황을 바꿀 수는 없다는 말이다.

자신의 불행에 엄마 탓만 할 수 없는 두 번째 이유는 또 있다. 최근 이론에 따르면, 아주 악하고 나쁜 부모가 아니라면 자녀의 정신장애에 원인이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190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자녀가 자폐증인 경우 ‘어머니가 냉장고처럼 차갑기 때문’이라든지, 자녀가 정신분열병인 경우 ‘부모가 자녀에게 이중적 메시지를 주었기 때문’이라든지 하며 자녀 불행이 부모 탓이라는 이론이 많았다. 정신장애 자녀를 둔 부모는 자녀를 바라보는 고통과 함께 자기 잘못으로 아이가 잘못됐다는 죄책감까지 느끼며 이중의 고통을 받았다. 하지만 뇌 과학의 발전과 함께 많은 정신장애의 경우, 부모 잘못이 아니라 뇌의 발달이나 기능의 문제라는 것이 밝혀졌다.

때때로 심리학은 일반 대중에게 지나치게 단순화되어 전달되는 경향이 있다. 지크문트 프로이트가 성인기 행동과 반응의 뿌리가 인생 초기 경험에 있을 수 있다고 한 것이 성인기에 겪는 정서적 어려움의 모든 근원이 부모의 잘못에 있다는 식으로 잘못 알려졌다.

영국 소아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도널드 위니컷은 ‘엄마가 꼭 완벽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엄마는 그냥 ‘평범한 정도로’ 아이에게 좋은 엄마이기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아이는 ‘엄마가 나의 필요를 늘 바로바로 맞추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하면서 도리어 엄마가 없는 상황의 불안을 다스리는 것을 배우고, 자신이 엄마로부터 독립적인 존재라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최근 뇌 과학에서도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내가 의대에 다닐 때만 해도 성인의 뇌는 이미 발달이 끝났기 때문에 더이상 변화되지 않는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성인의 뇌도 매우 역동적으로 변화한다는 점이 밝혀졌다.

2004년 과학잡지 ‘네이처’에는 저글링(공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고 돌리는 놀이)을 전혀 하지 못하는 성인들을 석 달 동안 가르친 뒤 배우기 전후의 뇌를 비교한 논문이 실렸다. 저글링을 훈련받은 성인은 측두엽 부위와 두정엽 부위의 회질 밀도가 증가했다. 2006년에는 독일 예나대 연구팀이 의대생들을 대상으로 3개월의 집중적인 시험 기간 전후에 뇌 영상을 찍어보았더니 기억력을 관장하는 해마체의 회질 밀도와, 지적 능력과 관계있는 두정엽 부위 회질 밀도가 증가했다.

이런 점들로 미루어 보건대, B 씨의 우울증과 알코올의존증을 부모 탓으로 돌리긴 어렵다. 물론 가끔 인면수심의 나쁜 부모들을 뉴스에서 보게 되지만 일반화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선택과 결정, 행동으로 자신의 뇌를 매일매일 조각하고 있다. 오늘 좋은 영화를 보느냐, 폭력적인 컴퓨터게임을 하느냐에 따라서 뇌의 모양과 연결성이 변화된다. 식사 후 그냥 앉아서 TV를 보느냐, 산책을 나가 걷느냐에 따라서도 뇌는 달라진다.

유산소 운동을 하면 뇌유래 영양인자, 즉 뇌세포를 더 활동적으로 만들고, 더 건강하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단백질이 나온다. 반대로 우울증이 심할 때 술이나 마약은 더 극단적으로 뇌를 망가뜨린다. 우울한 기분이 들 때 술을 마시면 금방은 기분이 나아지지만 다음 날부터 더 우울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우리는 청소년기와 성인기를 매일 보내고 있다. 아주 어릴 때는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마음에 안 드는 내 모습, 그 원인을 부모에게서 찾으려는 건 인생의 허비가 아닐까.

류인균 이화여대 약대 석좌교수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자식#부모#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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