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김창원]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의 한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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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1년 9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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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원 도쿄 특파원
김창원 도쿄 특파원
일본의 시민운동은 한국에 비하면 수수하기 짝이 없다. 중앙보다는 지방에서, 정치적 이슈보다는 생활 속 현안에 집중하는 일본 시민단체는 비조직적이고 탈정치적이다. 핵무기반대나 평화헌법 수정을 반대하는 정치적 시민단체라고 해도 시민세력의 조직적 연대보다 각자 현장에서 제 할 일을 묵묵히 실천할 뿐이다. 한국의 수많은 시민운동단체들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한진중공업 정리해고 사태, 제주도 해군기지 건설반대 등 이슈마다 똘똘 뭉쳐 조직적인 힘을 과시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다원화된 현대사회에서 시민단체가 한목소리를 내는 것도 이해하기 어렵지만 일본 시민운동에선 ‘세상을 바꾸는 힘’이 부족해 보인다.

그런 일본에서 지난해 6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처음으로 시민운동가 출신인 간 나오토 정권이 탄생했다. 간 전 총리는 ‘65학번’으로 대학 시절부터 열렬한 학생운동가였다. 정치인이 된 후 1996년 후생노동상으로 입각했을 때는 혈액제제로 인한 에이즈 감염 피해가 행정부실에 따른 사고였다는 사실을 밝혀내 일본 정치인의 양심으로 여겨지기도 했다.

취임 후 그는 시민운동가 출신답게 ‘최대 행복이 아닌 최소 불행사회’를 지향하겠다고 했다. 공공투자형 성장정책(제1의 길)과 탈규제 민영화와 같은 신자유주의(제2의 길) 대신 세금을 더 거둬 사회보장을 확충하는 착하고 현명한 정부라는 ‘제3의 길’을 제시했다. 개인의지와 무관하게 생존을 위한 무한경쟁에 내몰리는 시대에 사회격차를 줄이고 통합을 지향하는 그의 비전은 비슷한 문제를 안고 있는 한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았다.

그러나 간 내각은 출범 직후부터 바람 잘 날이 없었다. 취임 한 달 만에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 채 익지도 않은 ‘소비세 10% 증세안’을 꺼냈다가 참패했다. 같은 해 9월 센카쿠열도를 둘러싼 중국과의 마찰은 외교력 부재를 드러냈다. 동일본 대지진과 원전사고 직후에는 실효적인 대책을 내놓지 못한 채 허둥지둥했고, 치밀한 준비 없이 내놓은 ‘탈원전’ 정책은 각료는 물론 재계의 반발을 불렀다. 취임 당시 80%에 육박하던 지지율은 10%대로 추락해 가장 낮은 지지율로 정권을 마감한 몇 안 되는 총리로 기록됐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표현은 다르지만 일본 내에서는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의 한계’라는 데 이견이 없는 것 같다. 그는 “권력을 시원하게 비판하는 데는 익숙해도 정권의 구체적 비전과 실현할 수단에 대해서는 능력도 고민도 부족했다.” 끊임없이 새 이슈를 제기하며 화제의 중심에 서 있으려는 시민운동가적 체질을 벗지 못한 아마추어였다는 것이다.

이는 비단 보수파만의 지적이 아니다. 시민운동가 출신 정치인으로 사민당을 탈당해 간 내각에 합류한 스지모토 기요미 의원(51·여)은 최근 일본 마이니치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일국의 정치지도자에 요구되는 건 생각이 다른 사람을 존중하고, 하고 싶지 않은 일도 타협하며 이해관계를 조정하는 통치자로서의 역할”이라며 “시민운동 쪽 사람인 간 전 총리는 그런 훈련이 부족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옳다고 믿은 간 전 총리는 상반된 주장을 하는 사람은 모두 ‘기성권력’이요, 부정해야 할 대상으로 밀쳐냈다. 그 결과 야당 관료 재계 심지어 같은 당 내 인사들도 그에게 등을 돌렸다. 기존 권력과 차별화하기 위해 선명성 투쟁에만 매달릴 뿐 타협할 줄 모르는 ‘쌈닭 정신’으로는 아무것도 ‘생산’할 수 없었던 셈이다. 간 전 총리는 1980년에 국회의원에 당선돼 30년 넘게 ‘정치밥’을 먹은 10선 의원이었는데도 그런 한계를 벗어나기가 힘들었던 것 같다.

김창원 도쿄 특파원 changkim@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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