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일보 속의 근대 100景]<52>청년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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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09년 12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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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청년회에서는 오는 륙월 삼일 밤에 종로청년회관에서 학술강연을 하고자 종로경찰서에 허가를 신청하엿든 바 종로경찰서에서는 강연문뎨 중 근세구주렬국(近世歐洲列國)과 외교모순이라는 것은 학술문뎨가 아니오 정치문뎨라하야 금지하엿는데….”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

“독창회, 독립만세 연상”
日집회금지-검열 남발
학생층 항일-계몽 앞장


일제강점기 청년운동을 활발히 펼친 YMCA 농촌사업지도자협의회 대표들. 1926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일제강점기 청년운동을 활발히 펼친 YMCA 농촌사업지도자협의회 대표들. 1926년에 촬영한 사진이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1920년대 초반 청년운동은 지식층이 주도하는 문화 운동이었다. 근대 교육을 받은 학생층을 중심으로 조직된 청년단체는 반일과 문화 계몽 활동을 함께 했다. 일제는 청년들의 활동 전반을 검열하고 탄압했다.

1920년 7월 11일 동아일보에는 경찰이 재령청년회가 주최한 토론회의 제목을 문제 삼았다는 기사가 실렸다. 경찰은 ‘우리는 슬퍼할까? 즐거워할까?’라는 제목을 ‘우리는 지식 뿐으로는 슬퍼할까? 즐거워할까?’로 고치도록 했다.

같은 해 8월 경남 하동군 읍내 예배당에서 ‘사회를 유지함에는 도덕이냐 법률이냐’는 주제로 토론회가 열렸다. 한 참석자가 “작년에 일어난 독립운동을 도덕으로는 도저히 폐지할 수 없고 법률로는 폐지할 수가 있다”고 말하자 경찰이 “불온한 언동”이라며 그를 2주간 구류에 처했다. 1921년 8월 평양 학생들로 구성된 순회강연단이 평남 덕천에서 강연회를 가진 뒤 ‘독창회’를 열려 했지만 경찰은 ‘독’자는 ‘독립’을, ‘창’자는 ‘만세’를 의미한다며 이를 중단시켰다.

이화학당 중등과 2학년이었던 한 여학생은 여름방학 때 고향 함북 성진군 성진면 예배당에서 ‘쾌활한 청년과 그들의 전도(前途)’라는 제목으로 강연하다 ‘정치에 관한 범죄처벌의 건’ 위반으로 함흥지방법원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1921년 9월 6일). 여학생이 청년회에 기부했다는 이유만으로 검거(동아일보 1920년 9월 4일)되기도 했다.

우편 검열도 일제는 서슴지 않았다. 1920년 8월 18일 동아일보는 ‘이런 말도 쓰면 잡히어 가는 것’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전했다. 평북 강계청년수양회원 강병주는 중강진청년회원 강석문에게 편지를 보냈다. 강계경찰서는 편지 내용 중 ‘고(苦)는 락(樂)의 종(種)’이라는 대목을 트집 잡았다. “강석문은 그 편지를 도모지 바다 본 일이 엄다하며 이것은 아마 우편국에서 압수를 함이라 하며 형사 피고가 아닌 터에 남의 편지를 함부로 압수함은 0법이 아니라고 매우 분개한다더라.”

청년들은 1926년 6·10만세운동, 1929년 11월부터 1930년 초에 걸쳐 일어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투쟁을 벌여 민족운동의 주역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1930년대 들어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청년운동은 크게 위축됐다.

광복 직후 청년들은 ‘단결, 치안 유지, 일제 잔재 청산’이라는 구호 아래 한길을 갔지만, 좌우 대결이 심화되자 청년운동도 극심한 이념 대립을 겪었다. 1950년대 청년운동은 관제운동과 궐기대회에 일방적으로 동원됐으나 1960∼1980년대에는 반외세 민족주의, 반독재 민주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결집했다. 1990년대 이후에는 환경문제 등 새로운 분야에 눈을 돌리고 지역주민의 생활을 중심에 둔 지역청년운동이 활성화됐다.

조이영 기자 ly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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