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박제균]월스트리트엔 황소가 없다

  • 입력 2008년 10월 31일 02시 5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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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미국의 뉴욕을 다녀왔다.

기자적 궁금증 때문에 세계 경제불황의 진앙인 맨해튼의 월스트리트를 찾았다.

월스트리트는 맨해튼 아래쪽의 한 거리 이름. 뉴욕증권거래소(NYSE) 등 세계 경제를 움직이는 주요 금융기관이 포진한 이 거리는 5분만 걸어가면 끝이 날 정도로 짧았다. 이 짧은 거리가 세계 경제를 쥐락펴락하다 최근에는 물귀신처럼 불황의 늪으로 끌어당기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거리의 어디에서도 월스트리트의 상징인 황소상(像)을 찾아볼 수 없었다. NYSE 앞에서 경찰에게 물어보니 “좀 전에도 관광객에게서 같은 질문을 받았다”며 웃었다.

황소상은 월스트리트에서 멀지 않은, 맨해튼을 상하로 관통하는 브로드웨이의 남쪽 끝에 있었다. 주식 상승장을 상징한다는 황소는 주가 대폭락의 와중에서도 관광객들이 줄을 서며 사진 찍는 관광명소로 상한가를 치고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상징으로 알았던 황소가 정작 월스트리트에 없다는 사실에 다소 허탈한 느낌이 들었다. 황소로 상징되는 미국의 힘과 저력, 근면 성실 같은 미덕은 원래부터 월스트리트엔 없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그 대신 월스트리트엔 고급 보석매장인 티파니 등 명품 가게가 즐비했다. NYSE 맞은편엔 명품 중에서도 최고급인 에르메스 매장이 있었다. 월스트리트의 금융전문가들이 첨단 금융기법에 취해 경제의 근본인 ‘황소’를 버리고 명품 매장에서 대박을 자축하다 이 지경이 된 건 아닐까? 명품 매장 구경은커녕 허리띠를 졸라매다 월스트리트발(發) 경제폭탄을 맞아 벼랑 끝으로 내몰린 사람들만 억울할 뿐이다.

그런 월스트리트를 트리니티 교회가 가로막고 내려다보고 있었다. 트리니티는 미국이 첫 번째 핵실험에 사용한 핵폭탄의 이름이 아닌가. 탐욕에 취했던 월스트리트는 이번 사태로 핵폭탄을 맞았다. 그러나 1945년 트리니티 폭발의 영향권은 실험이 실시된 미국 뉴멕시코 주에 한정됐지만, 이번 금융 핵폭발의 후폭풍과 낙진, 방사능은 눈 깜짝할 새 전 세계로 퍼졌다. 졸지에 피폭자 신세가 된 한국의 주가와 환율, 그리고 민생은 아직도 널뛰기를 하고 있다.

월스트리트에서 서쪽으로 10분쯤 걸어가니 진짜 폭발 현장이 나타났다. ‘그라운드제로’는 2001년 9·11테러로 붕괴된 세계무역센터 쌍둥이 건물이 있던 곳이다. 아이러니하게도 현대의 제국인 미국의 본토가 공격당한 대사건의 현장과 세계 경제질서를 떠받치던 미국식 금융자본주의가 폭탄을 맞은 현장은 무척 가까웠다.

그라운드제로에는 공사용 칸막이가 쳐져 있었다. 현장을 들여다보기 위해 인근 세계금융센터(WFC)의 ‘윈터가든’(겨울 정원)이란 초대형 홀의 계단을 올라갔다. 대형 유리창을 통해 한눈에 들어오는 현장에선 테러 희생자들을 기릴 추모광장과 박물관, ‘프리덤타워’를 짓기 위한 기초공사가 한창이었다.

이제는 흔들리는 ‘경제 팍스아메리카나’의 상징인 WFC에서 ‘정치 팍스아메리카나’의 피격 현장을 들여다보는 감회는 남달랐다. 그러면서도 월스트리트의 재채기에 그만 독감에 걸려버리는 한국 경제를 생각하며 하루빨리 미국 경제가 그라운드제로처럼 재건의 망치소리를 내길 바랐다. 하지만 미국발 경제폭탄에 초토화되면서도 미국 경제 재건을 바라야만 하는 처지를 다시 돌아보니, 정말로 추운 겨울 정원에 선 것처럼 가슴이 시렸다.

박제균 영상뉴스팀장 phar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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