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상불가’ 상대와 협상 어떻게 하나

  • 입력 2007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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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상이 불가능한 자들(the non-negotiable)’과의 인질 석방 협상. 전 세계적으로 테러 집단에 의한 납치가 늘어나면서 국제사회는 이 같은 딜레마로 골머리를 앓아 왔다. 한국인 인질 21명을 억류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세력도 국제사회가 협상 상대로 인정하지 않는 대표적 협상 불가 세력이다. 그러나 ‘테러리스트와의 협상 불가’라는 원칙과 ‘생명 보호’라는 절대적 가치 사이에서 해법을 찾기란 좀처럼 쉽지 않다. 따라서 주요 납치 사건에서 각국 정부가 협상 불가 세력과 직간접적인 대화를 통해 사태 해결을 추구한 과거 사례를 연구하는 것은 탈레반과의 협상을 앞둔 한국 정부에도 참고가 될 듯하다. 전문가들이 소개하는 협상 가이드라인과 협상 과정의 변수들을 점검해 봤다.》

▽협상가가 지켜야 할 일반 원칙들=프랑스 소르본대의 귀 올리비에 포르 교수는 학술지 국제협상(International Negotiation)에 기고한 논문 ‘테러리스트와의 인질 협상’에서 △협상 전 단계 △협상의 틀을 정하는 단계 △세부 협상 단계 등 3단계로 구분해 설명했다.

그는 인질 석방 협상에는 납치범과 협상가 외에 인질과 가족, 공범, 중재자, 언론 등 이해 당사자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며 이로 인해 협상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다양한 변수를 사전에 충분히 이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협상 전 과정의 가이드라인으로 △말싸움에 말려들지 마라 △납치범의 말을 경청하라 △데드라인(시한) 정하는 것을 피하라 △타협을 하는 것처럼 보이되 어느 것도 쉽게 내주지 마라 △결정적 문제에 관해선 거짓말이 용인될 수 있음을 이해하라 △시간을 벌라 △납치범에게 공격이 없을 것임을 확신시켜라 등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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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 집단과의 협상, ‘빙산 이론’을 염두에 둬라=대화의 상대가 합법성이 결여된 범죄 집단이라는 사실은 협상을 어렵게 만드는 첫 번째 요인이다. 납치 사건이 빈번한 콜롬비아의 경우 아예 납치범과의 협상에 나서는 것 자체가 법으로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보통 정부나 기업이 협상에 나서더라도 개입 여부나 과정, 협상 조건은 철저히 비밀에 부친다. 포르 교수는 “대부분의 협상은 드러나는 것이 ‘빙산의 일각’일 정도로 비밀스럽게 진행된다”고 지적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0년 말레이시아의 한 리조트에서 유럽인 21명이 이슬람 극단주의 단체 ‘아부 사이야프 그룹’에 납치된 사건. 유럽 각국은 몸값으로 1인당 1000만∼2500만 달러를 건넨 것으로 알려졌으나 어느 나라도 이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납치범의 ‘로빈 후드’화를 경계하라=정권 퇴진, 수감자 석방, 무기 반입 허가, 주둔군 철수, 자신들의 존재 인정, 의회나 국제기구의 의석 확보…. 경제적 보상이 아닌 정치적 목적 관철을 위해 납치를 시도하는 세력이 내거는 요구 조건들이다.

납치범은 인질극이 성공하면 지지 세력에 ‘로빈 후드’ 같은 존재가 되고 실패하더라도 ‘순교자’의 이미지로 각인되는 경우가 많다. 한국인을 납치한 탈레반이 굳이 “돈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도 이를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납치범은 ‘잃을 게 없다’는 태도로 나오기 때문에 더더욱 협상이 쉽지 않다. 게다가 이들은 일반적 원칙이나 기준을 무시하고 수시로 말을 바꾸거나 약속을 깨기 십상이다. 이런 위험 요인을 염두에 두고 ‘체면 세워 주기’ 전략을 쓰는 것이 효과적일 수 있다.

▽타이밍을 노린 ‘살라미 전략’이 필요하다=보통 협상 기간이 길어질수록 납치범에게는 불리하다. 사태가 장기화되면 납치범이 먼저 누적된 피로감과 초조감을 느끼기 쉽고 상대방의 요구를 받아들이게 될 여지가 생긴다.

유능한 협상가는 이런 경우 인질범에게 조금씩 미끼를 던져 주며 변화를 유도하는 ‘살라미 전략’을 활용했다. 조금씩 얇게 잘라 먹는 살라미 소시지처럼 단계적으로 접근해 들어간다는 의미다.

하지만 국가가 협상의 주체일 경우 협상 기간이 길어질수록 무능하다는 비난 여론에 시달리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특히 유명 인사가 아닌 민간인이 인질로 잡혀 있을 경우 그 강도가 높아진다.

협상 장기화에 위협을 느낀 납치범이 인질 살해 등 극단적인 행동을 할 수도 있으므로 시시각각 변하는 납치범의 심리를 세심히 관찰해야 한다. 프랑스의 테러 진압 특수부대(GIGN)에는 납치범의 음성, 표현과 수위의 변화를 분석하는 전문팀이 구성돼 있다.

▽여론과 언론, 심리전에 유의하라=탈레반이 잇달아 언론을 통해 인질의 육성을 공개한 이번 한국인 피랍 사건에서 보듯 여론을 통한 심리전은 납치범이 중점적으로 활용하는 전략이다. 정부도 마찬가지다.

성공적인 엔테베 구출작전으로 유명해진 1976년 이스라엘인 납치 사건 당시 초기에만 해도 여론은 군사작전에 강하게 반대했다. 하지만 사태 해결이 늦어지면서 여론은 바뀌었고 결국 정부의 구출작전에 힘을 실어 줬다.

특히 언론의 역할은 중요하다. 1975년 영국 런던의 ‘스파게티 하우스 사건’ 당시 인질극을 벌인 일당은 언론 보도를 통해 당국이 자신들의 신상을 포함한 세세한 정보까지 다 알고 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심리적으로 무너져 투항했다.

물론 언론이 잘못 끼어들어 상황을 악화시킨 사례도 있다. 1977년 루프트한자 여객기 납치 사건 때는 납치범이 언론 보도를 들은 뒤 몰래 바깥으로 정보를 흘려 준 조종사 인질을 찾아내 살해했다.

최진태 한국테러리즘연구소 소장은 “언론이 납치범의 선전전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서는 나름의 원칙과 인내심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질의 태도도 변수가 될 수 있다=흔히 인질들은 수동적인 위치에 머물면서 납치범에 동화되는 ‘스톡홀름 신드롬’을 보이기 마련이지만 인질들이 사태 해결에 나름의 역할을 하는 경우도 있다.

1996년 페루 리마의 일본대사관에서 벌어진 납치 사건 당시 희한한 현상이 나타났다. 정부와의 대치 상태가 길어지는 가운데 납치범인 페루의 좌파 반군세력 일부가 인질들의 성품과 논리에 동화되기 시작했다.

이른바 ‘리마 신드롬’으로 불리는 이 사례는 인질의 태도가 사태 해결에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4개월 만에 페루 정부의 진압작전으로 전원 사살되기 전까지 납치범들은 강온파 간 내분을 겪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5년 네덜란드 열차 납치 사건에서는 인질들의 마지막 유언이 매우 감동적이어서 납치범이 살해 의사를 접기도 했다.

인질협상 전문가인 이종화 경찰대 교수는 “(종교 차이에 대한 말싸움 등) 인질과 납치범 간 갈등으로 되레 상황이 악화되는 이른바 ‘런던 신드롬’을 피해야 한다”는 지적도 내놨다.이정은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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