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理知논술/영화, 생각의 보물창고]양들의 침묵

  • 입력 2006년 12월 19일 02시 57분


코멘트
그래픽 이혁재 기자
그래픽 이혁재 기자
《아, 정말 소름끼치는 영화입니다.

‘양들의 침묵(The Silence of the Lambs)’.

조너선 드미 감독의 이 영화는 1992년 아카데미 작품, 감독, 남·여우주연, 각색상 등 5개 부문을 수상한 걸작 심리스릴러입니다.

15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모골이 송연할 만큼 인간의 어두운 심리와 욕망을 제대로 꿰뚫고 있는 영화죠.

인육을 먹는 ‘한니발 렉터’ 박사로 출연한 앤서니 홉킨스.

그의 고양이처럼 싸늘한 눈빛은 지금도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는 지옥의 이미지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생각해 보았나요?

영화 속 렉터 박사와 애송이 수사요원 스탈링, 그리고 연쇄 살인범 버팔로 빌은 사실 같은 처지에 놓인 인물들이란 사실을 말이죠.》

[1] 스토리라인

미 연방수사국(FBI) 수습 요원인 스탈링(조디 포스터)은 어느 날 상관인 크로포드에게 불려갑니다. 상관은 몸집이 큰 여성들을 연쇄살해한 후 피부를 벗겨내는 엽기적인 살인마 ‘버팔로 빌’ 사건을 조사하라는 지시를 하지요. 스탈링은 크로포드의 명령에 따라 감옥에 갇힌 정신과 의사 출신 한니발 렉터 박사(앤서니 홉킨스)를 찾아갑니다.

얼음장보다 차가운 성격의 렉터 박사는 환자 9명의 인육을 먹고 수감된 인물. 두려움을 느끼던 스탈링은 차츰 박사에게 묘한 호감을 느끼게 되고, 박사와 ‘위험한 거래’에 들어갑니다. 박사가 버팔로 빌에 대한 단서를 주는 대신, 스탈링은 자신의 어두운 과거사를 박사에게 풀어놓아야 했던 거죠.

한편 상원의원의 딸 캐서린이 버팔로 빌에게 납치됩니다. 다급해진 FBI는 스탈링을 수사에서 제외시킨 채 렉터 박사와 직접 교섭에 들어갑니다. FBI는 박사에게 편안한 환경에서의 수감생활을 보장하는 대신 범인의 정체를 알려 달라고 하죠.

범인의 은신처를 급습한 FBI. 하지만 이게 웬일입니까? 범인을 헛짚고 만 것입니다. 같은 시간, 스탈링은 박사가 남긴 사건해결의 실마리(“첫 번째 원칙은 ‘단순성’이야”)에 따라 진짜 범인인 버팔로 빌의 집 초인종을 누릅니다. 스탈링은 천신만고 끝에 사건을 해결하고, 이송 도중 탈출한 렉터 박사는 스탈링에게 전화를 걸어옵니다.

“이제 양들이 울음을 멈췄나?”

[2] 주제 및 키워드

여수사관이 연쇄살인범을 붙잡는 단순한 이야기 속에 무슨 주제가 있겠느냐고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양들의 침묵’은 여느 범죄 심리 스릴러와 달리, 그 안에 인간의 내면과 탐욕에 관한 깊은 성찰을 묻어두고 있습니다.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키워드를 찾는다면, 그건 바로 ‘변신(transformation)’ 혹은 ‘변화(change)’입니다. 남자라는 스스로의 성(性)을 부정하고 여자가 되었다는 착각에 빠진 살인마 버팔로 빌이야말로 ‘변신’을 꿈꾸는 존재입니다. 그가 여성의 피부를 벗겨(아, 너무 잔인해요) 옷을 만들어 입는 것도 진정한 여성으로의 변신을 욕망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이 ‘변신’이란 단어는 살인마를 쫓는 스탈링 요원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됩니다. 살인범과 수사관은 일견 극한의 대척점에 선 존재들인 것처럼 보이지만, 영화 속에서 버팔로 빌과 스탈링은 사실 내면적으론 다를 바 없는 인물인 것입니다. 어린 시절 고아가 된 스탈링은 양을 키우는 목장에서 겪었던 끔찍한 악몽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의 나약함에 종지부를 찍기 위해, 온갖 고통을 감내하며 FBI 요원이 되려하는 것이니까요.

혹시 ‘트라우마(trauma)’라는 말 들어보았나요? 좀 더 쉬운 말로는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라고도 불리는 증세인데요. 과거 심각한 사건 사고를 겪으면서 받은 정신적 충격이 장기간 지속되는 증세를 일컫는 단어죠. 그러니까 스탈링 요원은 어린 시절 목장에서 겪었던 사건 때문에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려왔고, 이젠 ‘변신’을 욕망하는 연쇄살인범을 제 손으로 잡음으로써 과거의 굴레에서 벗어나 새로운 자아로의 ‘변신’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이런 뜻에서 살인마 버팔로 빌이 희생자의 입속에 박아놓았던 나방의 번데기는 절묘한 상징이 아닐 수 없습니다. 번데기는 바로 ‘변화’의 상징이니까 말이죠. 견고한 껍질을 박차고 나와 하늘을 자유자재로 나는 나방의 모습은 △남자라는 정체성의 ‘껍질’을 뚫고 나와 여자가 되길 갈망하는 살인마나 △과거라는 고통의 ‘껍데기’를 찢고 나와 새로운 자신이 되길 원하는 스탈링이 지닌 욕망, 그것에 대한 알레고리(비유)였던 것입니다! 게다가 감옥(번데기)을 탈출해 자유의 몸(나방)이 되는 렉터 박사의 운명에 대한 기가 막힌 암시이기도 하고요.

평생 스탈링의 꿈속에서 지독하게 메아리쳤던 양들의 비명이 비로소 침묵으로 바뀔 수 있었던 것이죠.

[3] 뒤집어 생각하기

영화 속 렉터 박사를 떠올려 볼까요? 정말 끔찍한 인물입니다. 인육을 먹으면서도 맥박수조차 변하지 않는 잔혹한 냉혈한이니까 말이죠.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이런 엉뚱한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과연 렉터 박사는 악(惡)을 대변할까?’

적어도 법적인 판단에서 렉터 박사는 ‘범죄자’입니다. 인격을 가진 사람을 죽이고 그 인육을 먹었으니까 말이죠. 하지만 외적 강제력을 갖는 법률을 떠나, 이번엔 각자의 내면적 원리에 충실한 상태에서 렉터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내려봅시다.

도덕의 잣대를 갖다댈 때 이 영화 속에서 선악을 구분 짓기란 실제로 쉽지가 않습니다. 스탈링과 렉터의 대화를 몰래 녹음한 교도소장 칠튼 박사를 떠올려 보십시오. 렉터의 사건 분석을 마치 자신의 업적인 양 거짓 선전함으로써 부와 명성을 얻으려 하는 칠튼 박사야말로 렉터 박사 이상으로 도덕적인 지탄을 받아야 할 인물이 아닐는지요. 순진한 스탈링 요원을 이용해 렉터 박사에게 접근하려는 크로포드는 또 어떻고요….

렉터 박사에게서 보듯, ‘행위의 잔혹성’과 그 행위에 대한 ‘도덕적 선악 판단’이 늘 함께 가는 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됩니다.

영화 ‘드라큘라’(1992년)를 보십시오.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의 왕자 드라큘라는 십자군에 참가해 온몸을 던져 조국을 구합니다. 하지만 아내는 남편 드라큘라가 전사했다는 터키군의 거짓정보를 듣고 자살하죠. 싸늘한 시신으로 변한 아내 앞에 선 드라큘라. 그는 추기경으로부터 “자살한 자의 영혼은 구원받지 못한다”는 교회의 계율을 듣고 울부짖습니다. 교회를 저주하며 “죽음에서 부활해 어둠의 힘으로 아내를 위해 복수하겠다”고 맹세하죠.

자, 이런 이유로 흡혈귀가 되어버리는 드라큘라. 이후 잔혹한 피의 화신이 되는 드라큘라를 우리는 일고의 여지도 없이 ‘악’으로 규정할 수 있는 걸까요?

이승재 기자 sjda@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