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30>만들어진 고대

  • 입력 2006년 8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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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동아시아 사학사에서 20세기란 국민 국가의 거푸집 속에서 상상의 공동체를 창출하기 위한 이야기를 재생산한 ‘國史의 시대’로 자리매김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손 치더라도 도대체 우리는 ‘국사의 시대’에 짜여진 이야기에서 언제쯤 해방될 것인가?” ―본문 중에서》

‘근대 국민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라는 부제를 단 ‘만들어진 고대’는 일본 와세다대 이성시 교수의 사론집(史論集)이다. 이 교수는 재일한국인 2세로, 불과 최근까지만 하더라도 일본에서는 주변적 학문 분야에 지나지 않았던 한국사 연구가 일본 학계에서 ‘시민권’을 획득하고 정당한 위상을 차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언뜻 봐도, ‘만들어진 고대’라는 제목이나 ‘근대 국민국가의 동아시아 이야기’라는 부제 모두 심상치 않다. 고대가 ‘만들어졌으며’, 그것은 국민국가의 동아시아 차원의 ‘이야기’라는 것인가? 그렇다. 그는 한국의 고대, 나아가 동아시아의 고대는 ‘현재’를 과거에 투영해 과거 속에서 읽고 만들어낸 일종의 ‘이야기’라고 본다.

고대사 해석을 둘러싸고 한일 간에 가장 첨예한 쟁점 중 하나였던 광개토왕 비문은 고구려 멸망 이후 1200년간 묻혀 있었지만 1883년 홀연히 소생하였다. 일본의 역사학자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제국주의 국가로 성장하던 근대 일본의 시대 인식을 광개토왕 비문 해석에 고스란히 담았다. 20세기 초 일본이 러시아와 싸워 이겨야 하는 이유를 고대의 왜(倭)가 고구려를 꺾은 데서 찾고, 이를 광개토왕 비문 해석을 통해 확인하고자 했다.

이에 대응해 한국과 북한의 역사학자들은 고대 삼국의 역사에 근대의 한민족을 투영하여 비문 해석을 시도했는데, 이는 각도를 달리해 본다면 근대 일본이 창출한 비문 해석의 틀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행위로 간주할 수 있다. 한국과 중국이 발해를 각각 자국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것도 자국의 현실적 과제를 고대에 가탁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는 지배공동체를 초월하려는 고구려 왕권과 지배공동체 사이의 상극이라는 사회적 맥락 속에서 광개토왕 비문을 읽어야 한다고 본다. 광개토왕 무훈 기사의 수사학은 왕의 위대함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동원된 것이며, 이때 고구려 질서를 위협하는 외부의 적인 왜는 만만치 않은 상대로 묘사될 필요가 있었다고 보는 것이다.

요컨대 저자는 민족과 국가의 형성 과정이 매우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믿도록 했던 고대사가 근대적이고 작위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동아시아 평화와 연대를 위해서는 민족과 역사의 신성을 세속화하는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윤해동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16일부터 ‘세계화 이해하기 20선’ 싣습니다

동아일보가 지난해부터 시작한 ‘책 읽는 대한민국’ 캠페인 시리즈 중 2006년 제7부 ‘흥미진진한 역사 읽기’ 30선이 5일자로 끝납니다. 제8부는 ‘세계화 이해하기’ 20선입니다. 세계화 물결이 지구촌 곳곳에 격랑을 일으키는 우리 시대에 세계화의 다양한 면모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책들을 16일자부터 소개할 예정입니다. 독자 여러분의 변함없는 성원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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