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미진진 역사 읽기 30선]<9>아리랑

  • 입력 2006년 7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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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은 선도 아니요 악도 아니다. 또한 죽음은 무익한 것도 아니요 꼭 필요한 것도 아니다. 스스로 믿고 있는 하나의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싸우다 죽는 것은 행복한 죽음인 것이다. 나는 너무나 많은 인명의 낭비를 보아 왔으며 결국은 실패로 끝나고 마는 쓸데없는 희생을 너무나 많이 보아 왔다. 그래서 나의 경우에는 이것을 철학적으로 시인한다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한 가지만은 늘 기억하고 있다. 혁명가들은 자기의 희생 속에서 행복하게 죽어 가는 것이요, 그것이 무익하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본문 중에서》

가끔씩 님 웨일스의 ‘아리랑’이란 책이 없었다면 우리 근현대사가 얼마나 쓸쓸했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나라를 빼앗긴 암울한 시절, 머나먼 이국땅으로 건너가 중국혁명의 소용돌이 속에 이름 없이 죽어간 청년들…. 이 책이 없었더라면 우리가 그 숨 막히는 사연을 상상인들 할 수 있었을까?

냉전과 군사독재에 찌들었던 시절, 우리의 독립운동사는 어딘가 궁색해 보였다. 저 이념의 벽 때문에, 온몸을 내던진 치열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6·25전쟁 때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기 때문일까? 사회주의자들이 벌인 독립운동 이야기는 전승되지 못했다. 어렴풋이 ‘아리랑’이란 책이 있다는 소문만 돌았었다. 그러다가 광주의 충격 속에 타는 목마름으로 우리의 근현대사를 파헤치던 1984년, ‘아리랑’은 마침내 세상에 나왔다. 우리 근현대사의 가장 극적인 장면은 중국의 옌안 땅에서 푸른 눈의 미국 여기자에게 채록되어 영어로 출간되고 일어로 번역된 뒤에야 우리말로 간행되었다. 영어 원본이 나오고 42년, 일본어 번역판이 나오고도 31년이나 지나서였다. 군사독재 정권은 이 책을 즉각 금서 목록에 올리는 것으로 뒤늦은 출간을 맞이했다.

열다섯 어린 나이에 집을 떠나 일본으로, 만주로, 상하이로, 베이징으로, 광둥으로, 옌안으로 중국 대륙을 좁다 하고 혁명 투쟁의 현장에 몸을 내던진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은 섬 아닌 섬이 되어버린 분단 국가의 남쪽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에게는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나이 어린 독립군으로 출발해 무정부주의적 테러리스트로, 치열한 사회주의 혁명가로 살았고, 가장 민족적이면서도 국제주의에 충실했던 김산의 역동적 삶은 1980년대의 수많은 젊은이를 감동을 넘어 감전시켜 버렸다.

‘아리랑’ 출간은 정말 문화사적 사건이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었던 청년들은 꼭 그런 삶을 살고 싶어 했고, 글깨나 쓰는 사람들은 꼭 이런 책을 쓰고 싶어 했다. 단순히 책 한 권이 출간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 곁에 홀연히 김산이 돌아온 것이다. 아니, 중국혁명의 대하에서 물속의 소금처럼 사라져 버린 우리 독립운동의 정화였던 수많은 ‘김산들’이 생환한 것이었다.

1980년대의 열정이 사라진 지금, 김산은 지금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어떤 존재일 수 있을까? 고등학교 4학년, 5학년생이 되어 버린 대학생들,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순응하여 취업의 좁은 문을 통과하는 데 몰두하는 젊은이들과 민족 독립의 꿈을 잃지 않은 채 중국혁명에 뛰어들었다가 사라져 간 김산은 어떻게 만날 수 있을 것인가? 질풍노도의 1980년대를 살았고 지금 역사를 공부하고 가르치는 처지에서, 신자유주의의 공세에 감성마저 길들여져 가는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꼭 한번 만나 보라고 권하고픈 인물이 바로 그 사람, 김산이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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