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칼럼/우상전]햄릿에 ‘햄릿’이 안 보인다

  • 입력 2006년 6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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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리우드 영화를 누르고 한류다 해서 최고의 호황을 누리는 ‘드라마 천국’에서 “이를 지속시키려면 배우가 인문학적 소양을 가져야 한다”고 외친다면, 모든 사람이 빠져 있는 ‘월드컵 삼매경’에서 “앞으로 우리 국민이 계속해서 월드컵을 즐기려면 미래의 축구선수들이 충실하게 학교 수업을 받도록 해야 한다”고 외친다면 시쳇말로 “무슨 김밥 옆구리 터지는 소리냐”고 할지 모른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은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니라 축구전문가라는 점이다. 현대 축구는 힘만으로는 안 되고 ‘고도의 작전’을 수행해야 하기 때문이란다.

톱스타라 불리는 배우와 이웃 나라에서 일주일가량을 같이 보낸 적이 있다. 그는 촬영 틈틈이 시간을 내 대본을 읽었다. 곧 촬영할 장면의 대사를 외우기 위해 대본을 읽는 것이 아니라 다음 출연작을 고르느라 대본을 쌓아 두고 읽는 것이었다. 이 모습을 보고 ‘인기배우가 자신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대본을 읽는 뛰어난 능력이 있어야겠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물론 주변에서 많은 도움을 주겠지만 자기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이나 배역을 즐겨 연기할 배우는 없을 것이며 최종 선택에 대해서는 스스로 책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결국 배우의 ‘인문학적 소양’이 자신의 인기를 키우고 지속시키는 중요한 원천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들은 배우의 재능이 ‘끼’에 있다고 믿고 있다. 절대로 틀린 말도 아닌 게 어느 분야나 타고난 기본적인 소양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깊이 들어가면 끼로 대변되는 기본 소양은 최소단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쉬 눈치 챌 수 있다. 특히 연극배우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연극배우들이 늘 접하는 텍스트들이야말로 세계인이 인정하는 천재들의 창작물이다. 셰익스피어, 체호프, 입센, 브레히트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최고의 지성인들이어서 끼만으로는 접근이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배우에게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자산이 철학, 문학, 역사, 종교와 같은 인문학적 소양이다. 배우 자신이 감동을 받지 못하면 관객들을 감동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해 독일 작가 프리드리히 실러의 ‘떼도적’을 공연할 때의 일이다. 독일에서 온 안무가는 “배우들이 무슨 말인지를 모르고 지껄인다”며 불만이 많았다. 그는 배우들의 표정과 분위기만 보고 금방 알아챘다. 이런 상태에서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는 불가능하다. 독일 작품이라서 그렇다고 치부해 버리기에는 자괴심이 컸던 게 사실이다.

솔직히 많은 대학에 연극영화과가 생겨나기 전에는 다른 전공자들도 배우가 될 기회가 적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매년 1500명 이상의 전공자가 배출되는 데다 우리처럼 학연에 얽히기 쉬운 상황에서 연기의 기교를 배우지 못한 다른 분야 전공자는 배우가 되기가 정말 힘들어져 버렸다. 그리고 이런 현상이 인문학적 소양을 홀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필자는 기회 있을 때마다 연기술에 관한 이론을 전개하곤 한다. 연기술을 습득하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함으로써 인문학적 소양을 기르는 데 소홀해지는 현실이 답답해서이다. 또 많은 다른 학문 전공자가 손쉽게 연기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서 끼만이 판치는 현실을 타개하고자 하는 마음도 없지 않다.

생각해 보라. ‘고민하고 사유하는 햄릿’ ‘고통 속에 재해석되고 재창작되는 햄릿’을 보러 극장에 가지, 이미 알고 있는 햄릿의 줄거리를 다시 확인하겠다고 극장을 찾는 관객이 얼마나 되겠는가? 연극 세상이, 그 세상의 사람들이 이러한 점을 잊고 있으면 다른 장르와의 경쟁에서 뒤지고 만다.

우상전 국립극단 배우 ‘화술로 배우는 연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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