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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 ‘묶여있던 그녀’ 25년만에 입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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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북항쟁 ‘묶여있던 그녀’ 25년만에 입열다

입력 2005-09-05 03:02수정 2009-10-01 0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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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4월 사북항쟁 당시 광원들에게 붙들려 광업소 정문 게시판에 전깃줄로 묶인 김순이 씨. 김 씨는 욕설과 폭행뿐 아니라 발가벗겨진 채 성추행까지 당한 것으로 당시 사건 판결문에 나타나 있다. 동아일보 자료 사진

《지난달 8일 국무총리 산하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는 1980년 4월 강원 정선군의 ‘사북(舍北)노동항쟁’을 이끌었던 당시 탄광 노조간부 이원갑(李原’·65) 씨와 신경(申炅·63) 씨를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그들은 25년 만에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법’에 근거해 ‘불순한 폭동 주동자’에서 ‘민주화 인사’로 공식 인정받았다. 그러나 이 결정은 광원들의 ‘타도 대상’이었던 당시 노조지부장 이재기(李在基·1991년 사망) 씨의 부인 김순이(金順伊·65) 씨에게 ‘악몽’을 되살려냈다. 김 씨는 당시 사북항쟁을 주도한 광원들에게 끌려 다니며 성폭행 등 집단 린치를 당했던 인물. 그가 25년 만에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의 이야기는 사북항쟁의 또 다른 ‘진실’이다. 이원갑 씨와 보상심의위원회의 해명과 반론도 함께 싣는다.》

“(노조원 가운데 한 사람이) 김순이 씨의 음부를 손으로 만지고 음모를 3회가량 뽑은 후…, 얼굴에 가래침을 2회 뱉고 뺨을 3회 때리고 우측 구둣발로 김순이 씨의 좌측 허벅지 부분을 1회 차고….”

1980년 4월 강원 정선군 ‘사북노동항쟁’ 관련자들에 대한 군법회의 판결문에서 노조 지부장 이재기 씨의 부인 김순이 씨가 당한 폭행 사실을 설명한 부분이다.

지난달 8일 사북항쟁은 당시 탄광 노동자들이 ‘짐승만도 못한 삶을 못 견뎌 일으킨 노동항쟁’으로 25년 만에 ‘명예 회복’됐다. 노조원들이 당한 고문과 폭력도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김순이 씨는 “카메라와 플래시를 보면 아직도 묶여서 얻어맞던 일이 생각난다”며 사진촬영을 꺼렸다. 옆모습만 찍겠다고 해 촬영허락을 받았다.이종승 기자

그러나 항쟁 중 폭압의 피해자인 노동자들이 무방비 상태였던 김 씨에게 가한 또 다른 집단 폭력은 잊혀져 왔다.

▽“잊을 수도 없었고 잊혀지지도 않았다”=김 씨는 지난달 15일 큰아들에게서 이원갑, 신경 씨가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실신해 서울 종로구 연건동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병동에서 2주간 입원치료를 받았다.

김 씨는 “그때 광원들과 부녀자들이 나를 묶어 놓고 불태워 죽이자는 이야기도 했다. 몽둥이로 얻어맞아 울퉁불퉁한 자국이 아직도 뒤통수에 남아 있다”며 머리카락을 들춰 보여줬다.

사북항쟁 당시 노조원들은 “‘어용노조’ 지부장 이 씨가 회사 측 앞잡이가 돼 회사 측과의 임금협상에서 마음대로 임금을 정해버렸다”는 이야기에 분노해 이 씨를 찾아다녔다. 그러다 숨어 있던 김 씨를 발견하고는 김 씨에게 대신 분풀이를 했다.

부녀자들과 광원들은 김 씨를 묶은 후 사북 거리를 끌고 다니다가 광업소 정문 게시판에 전깃줄로 묶어 놓은 채 김 씨의 몸을 짓밟았다.

김 씨에게 사람들은 몽둥이와 욕설과 침 세례를 했고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성추행을 가했다. ▽“그 짓은 민주화 운동이 아니었다”=김 씨는 “이원갑 씨가 사람들 사이에서 묶여 있던 나를 쳐다보고 있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뭔가를 지시하는 것을 봤다”고 주장했다.

그는 그러나 “내게도 창피한 일이어서 25년간 병원신세를 지면서도 자식들한테도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면서 “하지만 그때 그 사람들이 민주화 운동 관련자로 인정받는 것만은 참을 수 없다”고 했다.

김 씨는 사건 직후 서울 세란병원으로 옮겨져 입원 치료를 받았지만 밤마다 병원을 나와 길거리를 헤맸다고 한다. 자신이 당한 일이 잊혀지지 않아 잠들 수 없었다는 것. 김 씨는 창피한 마음에 죽을 생각도 수없이 했다고 한다.

군사 정권하에서 탄광 노동자들의 생존권과 권리를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게 만든 노동운동사의 ‘위대한 항쟁’이 김 씨에게는 악몽의 시작이었던 것.

김 씨는 “사람들은 남편이 노조 돈을 빼돌렸다고 했지만 당시 사건으로 고문까지 당한 남편이 1991년 숨진 뒤 길거리로 나가 옷도 팔고 과일도 팔며 아들들을 길렀다”고 했다.

그는 “이제껏 잊어 보려 했지만 그 사람들이 국민 세금으로 보상금을 타 먹는 것까진 참을 수 없었다”고 했다.

김 씨는 네 아들과 함께 이원갑, 신경 씨의 민주화 운동 인정 결정을 취소해 달라는 행정소송을 낼 것이라고 밝혔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당시 노조간부 “불미스러운 일이었지만 항쟁 매도는 안돼”▼

이원갑 씨는 “사북항쟁 당시 김순이 씨에 대한 집단폭행은 내가 주도한 것이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씨는 “오히려 나는 경찰과의 협상 도중 김 씨가 광원들에게 붙들려 묶여 있다는 연락을 받고 달려가 김 씨를 풀어준 뒤 병원으로 보냈다”고 말했다.

이 씨는 “그때 그분(김 씨)이 당한 일은 분명히 불미스러운 일이었고 피해를 본 것에 대해선 앙금이 있을 테지만 그 때문에 사북항쟁 자체를 또다시 매도하는 쪽으로 몰아가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민주화운동 관련자 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 위원들의 대답은 엇갈렸다.

김삼웅(金三雄·독립기념관장) 위원은 “김 씨 사건은 보고받지 못했다”며 “관련 자료가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김 씨에 대한 폭행과 비민주적인 행위가 사실로 드러났다면 나는 그 결정을 재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백경남(白京男·여·동국대 교수) 위원도 “그런 자료가 있었는지 기억은 잘 안 난다”며 “관련자들에게 불법 사항이 있었다면 전반적으로 다시 검토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정동익(鄭東益) 위원은 “김 씨 사건을 알고 있고 관련 자료를 검토했다”고 말했다. 그는 “사북항쟁 과정 중 피해자가 생겼다고 해서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고 볼 수는 없다”며 “물론 김 씨 사건과 관련해 당시 노동자들이 잘했다는 것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볼 때 잘못된 일 한두 개 가지고 큰 것을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전지성 기자 vers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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