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포커스]지난해 脫北한 前북한축구대표팀감독 문기남씨

  • 입력 2004년 6월 15일 18시 19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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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아버지를 찾아 왔시오.” 9일 경기 구리시 프로축구 서울 FC의 훈련장에서 만난 문기남 전 북한축구대표팀 감독이 북한을 탈출해 온 과정 등을 설명하고 있다.-구리=전영한기자
“그리운 아버지를 찾아 왔시오.” 9일 경기 구리시 프로축구 서울 FC의 훈련장에서 만난 문기남 전 북한축구대표팀 감독이 북한을 탈출해 온 과정 등을 설명하고 있다.-구리=전영한기자
남쪽으로 간 아버지는 그에게 반평생 동안 ‘멍에’를 짊어지웠지만 결국 자유를 찾게 해준 원동력이기도 했다.

문기남(文基男·56) 전 북한축구대표팀 감독의 50여년 북한에서의 삶은 6·25전쟁 때 월남한 아버지 문정찬씨(78)에 대한 ‘애증’으로 점철됐다. 그에게는 ‘반동분자’의 자식이라는 꼬리표가 늘 따라다녔고, 이로 인해 여러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 그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을 떨칠 수 없던 그는 지난해 8월 북한을 탈출해 중국을 거쳐 올 1월 남한에 입국했다. 부인 이창실씨(54)와 경민(32), 경희(29), 용희(27), 경근씨(23) 등 2남2녀 를 모두 이끌고 왔다.

하나원 적응생활을 마치고 5월 말 ‘자유인’이 된 그를 9일 만났다. 그는 “아버지로 인해 어릴 때부터 맺힌 한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 아버지를 어렵게 찾아왔건만 아직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했으니…”라며 한숨부터 지었다.

북한에서 그는 어머니가 상당한 지위에 있는 양아버지에게 재가한 덕분에 평양에서 살 수 있었고 청소년대표와 올림픽대표, 국가대표를 지내는 등 겉보기에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했지만 언제 지방으로 쫓겨날지 모르는 불안감을 늘 안고 살아야 했다. 76년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등으로 한반도에 긴장이 높아지면 어김없이 ‘위험분자’들에 대한 숙청 선풍이 불었고, 그때마다 그도 지방으로 쫓겨나 오지를 떠돌아야 했다.

박해를 당하면 당할수록 그는 공 차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대학 진학의 길이 막혀 공부는 꿈도 못 꿨기에 축구는 그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다. 지방으로 쫓겨 가 살 때도 지역축구단에서 죽기 살기로 공을 찼다.

“북한에서는 친한 사람끼리 축구를 할 때 김일성 주석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마구 불러대며 공을 차곤 합니다. ‘야 김일성, 간다 썅. 받아 봐라’라고 외치는 식이죠. 당 간부들도 이를 알지만 어쩌지 못해요. 백성들이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억압체제에서 오는 울분을 터뜨릴 곳이 없기 때문이죠.”

그는 각고의 노력 끝에 1981년 군 체육단 선수 겸 감독이 됐고, 1990년 국가대표 감독에 올랐다. 북한은 감독 3, 4명을 뽑아 청소년팀과 올림픽팀, 대표팀을 돌아가며 맡긴다. 그는 1990년 아시아청소년선수권대회 때는 북한을 2위에 올려놓아 지도력을 인정받았고 이듬해 남북한이 단일팀으로 포르투갈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출전할 때 북한측 코치를 맡았다. 이때 서울을 방문해 훈련하면서 남한 생활을 ‘체험’했다. 그때 남한측 코치였던 최만희 부산 아이콘스 부단장(48)과는 ‘호형호제’하며 지금껏 친하게 지낸다.

그는 1994년 스웨덴여자월드컵 아시아 예선에선 북한여자대표팀을 2위로 이끌기도 했다. 탈북 직전까지 북조선축구연맹 경기처 상급부원으로 활동하는 등 북한 축구계에선 상당한 지위를 유지했다.

“솔직히 우리 가족은 북한에서도 시키는 대로 하면서 조용히 살 것 같으면 큰 문제는 없어요. 하지만 북한은 체제가 경직돼 단 하루도 맘 편히 살 수 없어요. 또 평양만 벗어나면 사람이 살 곳이 아닌 데가 너무 많아요. 굶어죽는 사람도 있고…. 아버지를 찾기 위해서도, 우리 가족의 미래를 위해서도 더 이상은 안 되겠다고 판단했습니다.”

‘미래’를 찾아 남한으로 왔지만 사실 그는 살길이 막막하다. 처음부터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들이 컴퓨터를 배우며 새롭게 한국 사회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면 불끈 힘이 솟는단다.

“탈북에 대비해 장성한 아이들의 결혼까지 막았습니다. 그렇게 준비한 덕분인지 아이들이 남한 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어 다행입니다. 저도 이제 일을 시작해야죠.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축구밖에 없잖아요. 기회가 된다면 유소년들을 지도하고 싶습니다.”

그는 지금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월남한 정섭(85), 정필(70), 정길씨(69) 등 삼촌들을 찾고 있다. 이들과 함께 남한에서 새로운 삶을 개척하는 게 그의 소망이다.

양종구기자 yjong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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