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일/패션 in 패션]몸 위에 전시한 걸작 회화

  • 입력 2003년 5월 22일 16시 41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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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골동품 수집가였던 디자이너 러셀 세이지는 고풍스러운 패브릭과 디테일을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3, 2004년 추동 런던 컬렉션에 선보인 신작에서는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회화 '시녀들'(오른쪽이 원화) 을 재현해냈다

한때 골동품 수집가였던 디자이너 러셀 세이지는 고풍스러운 패브릭과 디테일을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2003, 2004년 추동 런던 컬렉션에 선보인 신작에서는 17세기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가 그린 회화 '시녀들'(오른쪽이 원화) 을 재현해냈다


이번 시즌 전 세계 패션 시장의 최대 이슈는 루이뷔통의 새로운 가방 라인이다. 루이뷔통의 수석 디자이너 마크 제이콥스와 손잡고 이 가방 라인의 재해석 작업에 참여한 일본인 예술가 무라카미 다카시(41)는 이제 일반인들도 그 이름을 아는 유명 인사가 됐다.

무라카미는 만가(漫畵·만화)를 바탕으로 한 팝아트 스타일, ‘네오 팝 아트’가 큰 흐름을 이루는 일본의 현대 예술계에서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꼽힌다. 그가 디자인한 만화 같은 캐릭터 ‘미스터 도브’, 버섯, 눈, 꽃 등의 작품 시리즈는 전통적이지만 단순한 루이뷔통의 모노그램 라인을 컬러풀하게 바꾸는 데 기여했다.

패션 디자이너와 예술가가 기획 단계부터 함께 작업한 형태의 예술과 패션의 만남은 ‘합작(collaboration)’이라고 한다. 무라카미는 이 외에도 프랑스 디자이너인 루시앙 펠라피네와 함께 2003년 봄 여름용 캐시미어 스웨터를 만들면서 자신이 만든 캐릭터 ‘매직 머시룸’을 응용했다. 최근에는 이렇게 공동 작업을 통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예술과 패션의 합작형태가 크게 부각되고 있다.

지금까지 패션 디자이너들은 여러 방법으로 미술과 패션의 접목을 시도해 왔다.

그중 가장 기본이 되는 방법은 예술가의 작품을 프린트나 패턴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시초는 1965년 파리 컬렉션에서 디자이너 이브 생 로랑이 선보인 몬드리안 드레스. 네덜란드 출신의 추상화가인 몬드리안의 작품을 기하학적으로 디자인한 둥근 목선의 소매 없는 원피스는 ‘몬드리안 룩(Mondrian Look)’이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대대적으로 유행했다.

올 들어서 브랜드 로고를 디자인에 적극적으로 이용하는 ‘로고 플레이’가 많이 줄고 패턴이 전반적으로 예술화 또는 추상화되는 경향이 나타난다.

2003, 2004년 추동 컬렉션에는 많은 디자이너들이 여러 회화 작품을 디자인 패턴으로 사용함으로써 패션에서의 ‘아트 인스피레이션(art inspiration)’이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예는 샤넬의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였다. 라거펠트는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인 카지미르 말레비치의 영향을 받아 그의 그림을 가죽 패치워크 방식을 통해 의상에 그대로 재현했다. 또 ‘말레비치 풍’의 블랙 앤드 화이트 패턴을 선보였다.

미우미우컬렉션에서는 ‘연인들(Les Amoureux)’이라는 주제로 유명해진 프랑스 아티스트 레이몬드 페이네의 일러스트를 두 가지 소재로 만든 니트 톱이 사용됐다.

예술 작품은 디자인을 위한 ‘영감의 샘’ 역할을 하기도 한다. 폴 스미스는 지난해 러시아 여행을 마친 뒤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 1900년대 초반 러시아 작가들의 구성주의적 작품을 다룬 화보집 전시회 ‘더 러시안 아방가르드 북’(1910∼1934)을 관람했다. 이에 영감을 얻어 조형요소들을 미니멀하게 결합하는 디자인을 패턴과 커팅에 이용했다. 우연의 일치인지 샤넬의 라거펠트가 영감을 받은 말레비치의 작품을 다룬 책도 여기에 전시되어 있었다.

러셀 세이지가 2003, 2004년 추동 패션쇼 마지막 부분에 스페인 화가 벨라스케스의 회화 ‘시녀들’을 차용해 표현한 방법은 무척 독특하다. 그림 앞부분에 등장하는 인물들 의상을 디자인해 모델에게 입혀 그림과 똑같은 포즈를 취하게 한 뒤 앞부분 사람들을 제외한 사람이나 배경 요소는 쇼장 배경에 대형 그림으로 걸어 한 폭의 입체적인 그림처럼 표현했다.

△2003, 2004년 추동 시즌, 디자이너 미우치아 프라다는 ‘미우미우’ 컬렉션에서 프랑스 아티스트 레이몬드 페이네의 일러스트를 두가지 소재가 섞인 니트톱에 사용했다. △‘샤넬’ 컬렉션에서 디자이너 칼 라거펠트는 러시아 구성주의 작가인 말레비치의 그림을 가죽 패치워크 기법을 통해 그대로 의상에 재현했다. △도쿄 하라주쿠에 있는 프랑스 디자이너 루시앙 펠라피네의 매장. 무라카미 다카시가 디자인한 ‘매직 머시룸’ 캐릭터를 캐시미어 스웨터와 쇼윈도 장식에 사용하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

같은 시즌, 런던 컬렉션에 선 디자이너 베티 잭슨은 “모딜리아니의 작품 세계에 흠뻑 젖었다”며 모딜리아니 특유의 세련된 색채감을 현대적인 스포티즘, 오리엔탈리즘 등과 접목했다.

이번 달 뉴욕의 대표적인 패션 거리인 매디슨 애비뉴에서는 제4회 ‘패션이 예술을 만나는 곳(Where Fashion Meets Art)’ 행사가 열렸다. 매디슨 애비뉴에 있는 세계적인 럭셔리 브랜드와 뉴욕의 갤러리들이 공동으로 진행하는 이 행사는 매장에 미술 작품을 전시해 패션과 예술의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다.

올해는 72가의 랄프 로렌 매장에 전시된 빅토르 스크렙네스키의 사진 작품을 시작으로 57가에 이르기까지 38개 매장에서 여러 현대작가들의 회화 조각 사진 등이 전시되었다. 캘빈 클라인 매장에는 건축가이자 가구 디자이너인 루돌프 신들러의 가구가, 샤넬 매장에는 미국인 예술가 토머스 레니건 슈미트와 크리스토퍼 테너의 작품이 전시됐다.

예술계에서는 현재 트렌드가 ‘대중과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분석한다. 이는 대중이 참여할 수 있는 전시를 통해 이루어지기도 하고 좀 더 대중에게 친숙한 매체와의 공동 프로젝트를 통해 시도되기도 한다. 지나치게 상업적으로 흐르는 패션이 예술과의 합작품을 만들어낸다든가 너무 고립되어 가는 예술이 대중화를 위해 노력하는 요즘의 추세는 반대 방향이기는 하지만 공통된 이슈에서 시작되는 것이며, 패션 소비자나 문화 소비자에게는 반가운 일이다.

류민화 퍼스트뷰코리아 패션컨설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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