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먼&디지털]한나 아렌트의 '인간의 조건'

  • 입력 1999년 12월 31일 20시 48분


《21세기가 ‘디지털의 세기’가 되리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디지털 새 시대’에 대한 환상의 저편에는 엄청난 변화를 감당해야 한다는 불안감과 함께 기술의 무게에 눌려 희미해져 가는 ‘인간’의 모습이 도사리고 있다. 지난 세기 석학들이 ‘인간’의 문제를 바라봤던 시각에 전문가들의 안목과 상상력을 더해 오는 세기 인간의 문제를 미리 짚어보는 시리즈 ‘휴먼&디지털’을 10회에 걸쳐 마련한다. 우선 첫회는 ‘인간의 조건’(1958)의 저자이자 20세기 여성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75)의 시각을 빌려 21세기 인간조건을 독자들 앞에 제시한다.》

지난 세기 지구 위에 사는 인간의 80%는 인간이기보다는 인간이 아닌 기간이 더 길었다. 어떤 때는 ‘열등한 인종’이라고, 어떤 때는 ‘인민의 적’이라서, 또 어떤 때는 단지 제국주의 지배를 받는 ‘식민지 백성’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다들 인간답게 살고 싶어 했다.

이 인간됨에 조건이 있다면, 그 첫째는 당연히 인간은 ‘인간으로서 태어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계속 ‘성장’해야 하고, 한 인격체로 ‘성숙’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인간은 다른 인간들과 더불어 여러 ‘활동’을 벌인다. 즉 인간은 자기 몸을 통해 다른 생명체들과 끊임없이 교류하며, 살아남기 위해 ‘노동’하고 창조적으로 ‘작업’하며 사회적으로, 특히 정치적으로 ‘행위’한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일차적으로 이런 노동 작업 행위로 점철되는 ‘활동적 삶(vita activa)’이다.

나아가 인간은 ‘생각’하는 정신의 능력을 통해 이런 활동들을 보다 바람직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 경우에 따라 이 정신의 능력을 극대화함으로써 보다 폭넓은 삶을 누리고자 하는 이른바 ‘관조적 삶(vita contemplativa)’도 인간 삶의 엄연한 한 가능성이다.

그리고 인간은 각자 ‘죽음’으로써 자기 삶을 나름대로 ‘완결’짓는다. 그리고 적어도 20세기 초까지 이런 인간 삶의 가장 기초적인 모태는 ‘자연’의 터전인 지구라고 생각됐다.

일각에서는 인간이 인간으로서 가장 잘 살았던 시기가 20세기였다고 하면서도 우리는 왜 이렇게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을 새삼 헤아려야 했을까?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1957년 소련이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를 무사히 지구궤도에 올려놓았을 때 언론은 소련이 미국과 맞수라는 사실도 잊은 듯 감격스러워 했다. 이제 인간이 ‘지구라는 감옥’에서 탈출할 첫 걸음을 내디뎠다며 기뻐했다.

“기독교가 지구를 눈물의 계곡이라 부르고 철학자들이 육체를 영혼의 감옥으로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 그렇다 해도 바로 이 지구를 인간의 ‘감옥’으로 생각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새 천년 첫 날 지난 세기 중간쯤에 헤아렸던 이 같은 인간조건들을 되돌아보면 과거 인간에게 당연하다고 생각한 것 중 아직도 당연한 것으로 남아 있는 것은 거의 아무 것도 없다. 그리고 그 원인을 거슬러 가면 우리 인간의 비뚤어진 환상을 만난다.

인간은 지금까지 그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도 않은 채 ‘더 나은 인간’이 되는 데 광적으로 매달렸다. 이런 인간 개량의 꿈 속에서 인간은 인간을 공학적으로 만들 수 있는 비밀을 거의 다 알아냈다. 이제 인간은 어머니 배에서 자연적으로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더 우수한 인간형에 맞추어 주문 생산된다. 태어남은 더 이상 당연한 인간조건이 아니다.

또 인간은 지금까지 ‘더 많이, 더 빨리, 더 우수한’ 상품을 무제한 제조하기 위해 끊임없이 생산을 자동화해 왔다. 이제 공장에서 밀려난 인간들은 더 이상 쓸모 없는 ‘노동력’으로, 즉 노동력의 가치를 상실한 ‘인간’으로 용도폐기 당한다.

인간의 창조능력은 예술이나 종교를 통해 불멸의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정신적 창조능력은 현대에 들어와 경쟁 속에서 이익을 극대화하고 도구적 편의성을 증진시키는데 집중되었다. 철저하게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나온 이 편협한 창조성은 이제 그런 도구가 없으면 인간이 살 수 없는 생활구조를 정착시키기에 이르렀다. 인간은 더 이상 도구의 주인이 아니다. 이제는 도구에 맞지 않는 인간이라면 도구로 가득 찬 이 문명의 생활공간에서 쫓겨나야 한다.

20세기 내내 인간들은 참으로 부지런히 활동해 왔다. 그런데 이제 보니 21세기의 세계는 참으로 역설적으로 대다수 인간이 더 이상 수고스럽게 노동하거나, 창조하거나, 아니면 정치할 필요성이 없는 그런 세계, 인간이 더 이상 인간일 필요가 없는 세계가 돼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인간이 인간 아닌 것으로 되어간다는 것에 대해 아무 감정도 갖지 않게 된 것을 인간의 역사적 발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그러나 아직도 이런 무감각에 소스라치게 놀랄 감정을 남겨두고 있는 인간이 소수라도 존재한다면 그들이 지금부터 할 일은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노동’‘작업’‘행위’ 등 인간을 인간이도록 했던 조건들 말고도 인간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인간이게 할 마지막 능력, 즉 ‘생각함’에 골몰해 볼 일이다.

지난 세기 우리는 너무나 활동적이어서 도대체 어디까지 왔는지를 생각할 능력 자체가 퇴화해 버렸다. 사실 우리는 너무 바빴다. 그것도 나쁜 일에 너무 바빴다. 따라서 나의 21세기는 아무 일도 아니 할, 그리고 생각의 능력을 발휘할 인간 조건의 최후 수호자를 집중적으로 찾아헤매는 탐색의 세기가 될 것이다.

백 번 접어 우리의 21세기에 이런 능력을 가질 사람이 소수에 그친다 하더라도 그 소수마저 전혀 남지 않는 최악의 경우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생각함은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모든 활동, 그리고 활동으로 야기될 수 있는 일체의 악함으로부터 자유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각에 열중해 본 사람이라면 고대 로마의 공화주의자 마르쿠스 카토의 체험을 충분히 공유할 것이다. 즉 “인간은 자신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을 때 가장 활동적이며, 철저하게 혼자 있을 때야말로 가장 고독하지 않다.”

▼키워드/'악의 평범성'과 인간조건▼

한나 아렌트의 핵심 주제는 현대의 조건 아래서 현실 정치와 생활에 나타나는 악(惡)의 실체를 파헤치고, 그 악에서 해방된 보다 인간적인 삶의 질서를 찾는 것이었다.

20세기 초반의 나치즘과 스탈린주의는 악이 개인의 악한 본성에서 유래하는 것이 아님을 입증했다. 이 두 전체주의는 인간들로부터 생각할 능력과 기회를 체계적으로 박탈해서 그 활동력을 권력체제의 부속기능으로 위축시킨다.

그들은 잔인한 악행을 범하고도 자신이 악하다고 전혀 의식하지 못한다. 따라서 악은 도덕적 죄가 아니라 자기 체제에 충실하게 복무하는 평범한 인간의 무감각일 뿐이다. 아렌트의 저서 ‘전체주의의 기원’(1951)과 ‘예루살렘의 아이히만’(1963)은 정치체제에서 비롯되는 이런 ‘악의 평범성’을 부각시켰다.

반면 ‘인간의 조건’(1958)에서는 현대의 축인 과학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의 활동력을 도구화함으로써 인간을 탈인간화시키는 원인임을 밝혀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론▼

아렌트 사상의 형성에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친 두 사람은 젊은 날 차례로 그녀의 선생이 되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야스퍼스다. 하이데거는 그녀에게 그리스 철학의 정황을 생생하게 해독하는 법을 가르쳤고, 무엇보다 인간의 문제를 구체적인 존재 상황에서 고찰하는 사고의 단서를 마련해 줬다. 그러나 전통적인 존재론의 애매한 개념설정에서 벗어나 인간 삶의 다양하고도 기초적인 면모를 인간의 욕구와 가치에 결부하는 실천적 고찰법은 야스퍼스에 힘입은 바가 컸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인간의 바람직한 삶이란 어떤 것인가 라는 물음은 흔히 인간의 구체적 삶과는 너무 동떨어진 인간의 궁극적 본성을 추상적으로 해명하는 것으로 결판이 나곤 했다. 하지만 현대에 들어와 인간의 개성화가 급격하게 진전되면서 인간의 여러 속성 중 하나를 인간의 ‘본성’으로 간주하기가 대단히 어려워졌다. 막스 셸러, 헬무트 플레스너, 아널드 겔렌 등이 주도한 철학적 인간학은 생물학에서 파악된 다양한 인간상을 철학적 범주로 변용해 체계화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아렌트의 인간이론은 이런 과학주의적 발상에 저항해 인간이 정치적 행위를 조직하는 역사적 맥락에서 인간으로 되어가는 조건을 탐구했다. 이런 관점에서 그녀의 사상에 모범을 보인 것은 폴리스 공동체와 신앙공동체 속에서 우정과 사랑의 연대감을 개발했던 고대 그리스 및 원시 기독교의 전통이었다.

그녀의 사고방향을 순수철학에서 정치 쪽으로 돌리게 만든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그녀 자신 유대계 출신으로서 엄청난 위협을 당해야 했던 나치 체험이었다. 풍요로운 현대의 이면에 도사린 비인간화의 위협에 대한 부단한 경고는 당대 비평가들로부터 지나치게 비관적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20세기 후반 들어 현대성에 대한 비판이 일면서 그 선구자로 재평가되고 있다.

권력이란 강권의 행사가 아니라 나름의 견해를 가진 시민의 뜻을 모아 공적으로 조직하는 능력이라고 본 그녀의 권력 개념은 하베르마스의 의사소통적 권력 개념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했다.

홍윤기<동국대 철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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