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김학준/베를린 공수작전의 교훈

  • 입력 1998년 5월 20일 19시 36분


인도네시아 사태 때문에 세계의 관심이 동남아에 모아졌던 지난주 서방세계가 크게 주목한 기념일이 있었다. 14일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에 대항한 미국과 영국의 공수(空輸)작전 50주년’이 그것이었다. 48년5월 스탈린은 소련 점령지역 안에 자리잡은 ‘자유의 도시’ 서베를린을 군사적으로 봉쇄함으로써 독일의 다른 지역들을 분할 점령한 미국 영국 프랑스 등 3국으로 하여금 서베를린을 포기하게 만들고자 했다. 이에 맞서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영국과 더불어 서베를린 시민에게 생필품과 의약품을 공수하기 시작했으며 이 대담한 조처 앞에 스탈린은 결국 서베를린 봉쇄를 풀었던 것이다.

▼ 통독의 출발점된 사건 ▼

전후(戰後) 유럽의 냉전사에서 하나의 극적인 전환점이었던 이 역사적 사건의 뜻을 기리기 위해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이제는 하나로 통일된 베를린에서 콜 독일 총리와 만나 기념식을 가졌다. 그리고 독일의 대학들은 세미나를 열고 언론매체들은 특집을 마련했다. 필자는 괴팅겐대가 마련한 세미나에 참석해 적지 않게 배울 수 있었다.

참석자들은 우선 공수작전이 그때로부터 42년 뒤에 실현된 독일 통일의 출발점을 마련했다고 회고했다. 서베를린의 독일시민은 물론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역의 독일국민은 이 사건을 계기로 자신들의 지역을 빨리 하나로 통합해 소련에 대항해야 한다는 결심을 굳히게 됐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다음해에 그 지역들이 ‘독일연방공화국(서독)’으로 통합됐고 소련의 점령지역은 ‘독일민주공화국(동독)’이 된다.

그 뒤 서독은 일관되게 친미정책을 썼다. 미국이나 소련 어느 쪽에도 기울지 않는 중립정책을 쓰는 것이 통일을 앞당기는데 도움이 된다는 주장이 때때로 나왔으나 베를린 봉쇄와 공수의 경험은 오히려 미국과의 협력만이 서독의 안전과 통일에 보탬이 된다는 믿음을 심어주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이 이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 선뜻 가입한 것도 그러한 배경에서였다. 서독의 그러한 정책은 89, 90년에 충분히 보상됐다. 동독이 무너지면서 서독으로 합류해 들어옴에 따라 독일통일의 큰 길이 열렸을 때 미국은 독일 통일을 막으려 하지 않고 오히려 도왔던 것이다.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서독이 소련을 무시한 채 오로지 미국하고만 손잡고자 노력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소련의 팽창정책에 대해서는 단호히 맞섰으나 소련과의 ‘화해’를 실현시키기 위해서도 각별히 힘썼다. 특히 60년대말 이후 유럽에서 동서냉전이 풀리기 시작하자 브란트 정권은 이러한 국제적 분위기를 충분히 활용하면서 ‘동방정책’을 과감히 추진했던 것이다. ‘동방정책’의 핵심은 정경분리의 원칙에 입각, 소련과 동유럽에 대해 경제원조를 베풀어주는 데 있었다.

이 정책 역시 뒷날 충분히 보상됐다. 서독의 경제원조는 이웃 공산국가들을 서독으로 접근시키는 자석(磁石)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실제로 동독은 서독의 자장(磁場)에 흡인되고 만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소련은 동독의 붕괴와 서독으로의 흡수통일을 방관해 주었다.

크기는 달랐지만 소련의 베를린 봉쇄 2년 뒤에 소련은 북한의 남침을 지원했으며 마치 베를린 봉쇄에 대항했듯이 미국은 한국을 위해 공산군의 도발에 단호히 맞섰다. 그뒤 한국은 서독이 그러했듯이 일관되게 친미 정책을 써왔으며 또 80년대말 이후 ‘북방정책’을 통해 공산 국가들과의 수교에 성공했다.

▼ 남한 국력 한반도통일 변수 ▼

이제 바야흐로 새 정부에 의해 북한에 대한 정경분리 원칙도 추진되고 있다. 다만 문제는 남한의 자력이 어느 정도냐이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에 의존해야 할 정도로 취약한 남한경제가 북한을 유인할 만한 자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가. 결국 남북한의 경제력 또는 종합적인 의미에서의 국력의 격차가 어떻게 조성되느냐에 따라 한반도 통일의 방향은 일정하게 영향받을 것 같다.

김학준<인천대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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