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희에세이/21세기 앞에서]럭비 정신

  • 입력 1997년 4월 8일 20시 08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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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찾아보기 힘들지만 한때 투견(鬪犬)이 성행한 적이 있었다. 투견을 훈련시키는 과정을 지켜보면 매우 흥미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투견 챔피언으로 만들려면 보통 생후 6개월에서 1년된 어린 놈을 골라서 싸움부터 시키는데 그 대상이 은퇴한 챔피언이다. 은퇴한 챔피언은 나이가 들어 힘은 약하지만 워낙 노련해서 젖내나는 어린 투견이 힘이 빠질 때까지 적당히 싸우다 30분 정도 지나면서부터 어린 놈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은퇴한 챔피언이 이길 때쯤이면 조련사가 그 놈들을 떼어 놓는다. ▼ 패배주의 극복이 우선 그렇게 한번도 패하지 않으면서 퇴역 챔피언이 갖고 있는 기술을 전수받은 투견은 대회에 나가면 대부분 챔피언이 된다. 그러다가 한번이라도 지면 그 날로 은퇴시킨다. 싸움에 한번 진 투견은 다시는 챔피언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사람이나 기업에서도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잘 나가던 일류 인재나 일류 기업이 한번 패배해서 이류 인생, 이류 기업이 되고 나면 다시 일류로 올라서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것은 패배 자체의 타격보다 패배의식이 심중에 스며들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전후의 잿더미에서 세계가 부러워하는 경제성장을 일구어 냈다. 그 동안 만난 외국의 여러 인사들은 이런 성장과 발전을 기적이라고 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같은 기적의 바탕이 되었던 것은 「우리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런데 패배의식은 이런 가능성을 잠재운다. 패배의식이 공포를 불러오고 의지와 행동을 위축시키기 때문이다. 지금 불황의 단면들이 곳곳에서 보이는데 어떤 이는 공황(恐慌)의 조짐까지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경제가 어렵다는 이유만으로 공황이 오지는 않는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우리가 진정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은 패배의식에 사로잡히는 일이다. 경제적 공황은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지만 심리적 공황은 한번 빠지면 쉽게 벗어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럭비의 정신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럭비는 한번 시작하면 눈 비가 오더라도 중지하지 않고 계속 한다. 걷기조차 힘든 진흙탕에서도 온몸으로 부딪치고 뛴다. 오직 전진이라는 팀의 목표를 향해 격렬한 태클과 공격을 반복하면서 하나로 뭉친다. 그래서인지 럭비선수들은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럭비팀으로 모이기만 하면 사회적인 지위에 관계없이 모두 하나가 된다고 한다. ▼ 정신적 인프라 구축을 악천후를 이겨내는 불굴의 투지, 하나로 뭉치는 단결력, 태클을 뚫고 나가는 강인한 정신력, 이것이 럭비에 담긴 정신이다. 물론 야구 골프 등의 운동에도 저마다의 소중한 룰과 정신이 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것은몸을던져서라도 난관을 돌파하는 럭비의 정신으로 현재의 정신적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일이다. 이런 정신이 한 사회의 정신적 인프라(Infrastructure)로 자리잡을 때 그 사회는 위기를 이겨내는 저력이 생긴다. 어느 국가 사회 기업을 막론하고 진정한 힘은 사람에게서 나오며, 그 힘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것이다. 이건희(삼성그룹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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