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월의 보너스’냐, 골치 아픈 난수표냐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12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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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인 웃고 울리는 연말정산

#1. 직장인 안모 씨(33)는 5년째 연말정산을 하고 있지만 환급액수를 해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는 결혼을 하지 않은 채 혼자 살고 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부양가족이 없다. 씀씀이는 신용카드 대신 체크카드로 해마다 1400만∼1600만 원 수준을 오가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최근 국세청 홈택스에서 연말정산 환급액을 확인해 보니 2016년에는 10만 원을 세금으로 뱉어냈는데 2017년에는 70만 원을 돌려받았다. 지난해에는 20만 원을 돌려받았다. 곧 있을 연말정산에서는 얼마를 받을지 혹은 더 내게 될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연말정산이 ‘13월의 보너스’라고 하는데 금액이 들쭉날쭉해 ‘13월의 수수께끼’ 같다.

#2. 사무직 근로자 양모 씨(32)에게 원천징수세율 세 구간(80%, 100%, 120%)을 아느냐고 물었더니 처음 듣는다는 반응이 돌아왔다. 직장인은 정부가 월급에서 세금을 떼어가는 간이세액표의 세율을 세 가지 중 하나 고를 수 있다. 80%의 세율을 선택하면 당장 매달 받는 세후 월급은 늘어나지만 연말정산 때 뱉어내야 하는 세금이 많아진다. 반면 120%를 선택하면 세후 월급은 줄어들지만 연말정산에서는 환급액을 많이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정부는 이를 ‘맞춤형 원천징수 제도’라고 부른다. 물론 세 가지 중 무엇을 선택하든 최종적으로 내야 하는 소득세는 동일하다. 이런 설명을 들은 양 씨는 “결국 조삼모사인데 왜 이렇게 복잡하게 하는 거죠”라며 의아해했다.

○ 맞춤형 원천징수 제도는 왜 나왔을

연말정산을 두고 흔히 ‘모두가 알지만 모두가 모르는 제도’라고들 한다. 시간이 갈수록 연말정산의 구조와 방법을 이해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고 있다. 정권별로, 시기별로 연말정산을 결정하는 세법에 각종 정치 논리와 즉흥적 보완 대책이 덕지덕지 붙어 왔기 때문이다. 세법이 누더기가 되면 연말정산은 난수표가 된다. 직장인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맞춤형 원천징수 제도의 경우 2015년 1월 연말정산 파동에서 비롯됐다.

박근혜 정부 첫해인 2013년 정부는 세법을 고쳐 자녀 양육, 다자녀 공제 등 인적공제와 의료비 교육비 기부금 등 특별공제 제도를 세액공제로 전환했다. 정부는 연봉 5500만 원 이하 근로자는 부담이 줄어들고, 5500만∼7000만 원까지는 세금이 3만∼4만 원 정도 늘어나는 정도라고 했다. 적용은 2014년 귀속분(2015년 1월 연말정산)부터 하기로 했다.

2015년 1월 연말정산에 나섰던 직장인들은 바뀐 제도에 따른 공제 금액을 눈으로 처음 확인했다. 환급액이 줄었다는 불만이 여기저기에서 튀어나왔다. 산발적 불만은 곧 여론의 분노로 바뀌었다. 특히 추후 집계를 해보니 세금이 줄어든다는 5500만 원 이하 근로자의 15%(약 205만 명)가 세금을 더 낸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2015년 1월) 여론조사에서 박근혜 대통령 지지율은 29%로 곤두박질쳤다. 연말정산 논란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들끓는 민심에 놀란 정부는 그해 4월 ‘연말정산 보완 대책’을 내놨다. 근로소득 세액공제 혜택을 높이고, 자녀 세액공제 금액도 올리는 내용이 뼈대다. 중산층과 고소득자의 세 부담을 늘리고 저소득층의 세 부담은 줄인다는 애초의 취지는 사라져 버렸다.

맞춤형 원천징수 제도도 이때 만들어졌다. 개인 사정에 따라 원천징수 세액을 달리하게 해서 연말정산 논란을 차단하려는 의도였다. 하지만 최종적으로 내는 세금에는 변화가 없고 세정(稅政)만 복잡해진다는 지적이 나왔다. 그 지적이 현재까지도 유효한 것이다.

○ 연말정산이 도대체 뭐지?

직장인들은 연말정산이라고 하면 공통적으로 13월의 보너스를 먼저 떠올린다. ‘맡겨둔 돈’ 돌려받는 것 아니냐고도 한다. 동시에 난수표라는 단어도 언급한다. 해마다 1월이면 돈을 돌려받을 것 같긴 한데, 공제 항목이 워낙 복잡한 탓에 자세히 알려고 하지는 않는다.

연말정산은 1975년 처음 시작됐다. 정부는 한국의 근로소득세 체계에서는 세금을 미리 많이 거뒀다가 나중에 돌려줄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연말정산 제도를 도입했다고 설명한다. 직장인은 매달 근로소득의 일정액을 소득세로 내는데, 단순히 일정 세율을 근로소득에 곱해 바로 납부세액을 결정하는 게 아니라 일정 금액을 과세 대상에서 공제한다. 공제 대상 중에는 교육비, 의료비 등 사전에 알 수 없는 항목이 많다. 이 때문에 정부는 간이세액표에 따라 일정 세금을 먼저 거둔 뒤 지출에 따른 공제를 해서 연말정산 때 돌려주는 것이다.

연말정산은 세원 확대와 세금 징수 편의를 위해 도입한 측면도 있다. 세금 공제 혜택을 주게 되면 세정 당국이 굳이 조사를 하지 않아도 국민들이 각자 소비 명세를 자발적으로 신고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음지에 있던 자영업자나 지하경제의 세원이 노출되기 마련이다. 김대중 정부 때 신용카드 공제 혜택을 주기 시작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였다.

○ 공제 항목이 복잡해지는 이유

연말정산은 복지의 개념도 담고 있다. 자녀가 많거나 노부모를 부양하거나 혹은 병원비를 많이 내게 된 상황이라면, 과세 당국이 가계의 세금을 줄여주는 방식으로 복지 혜택을 제공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다. 한국은 다른 선진국들보다 복지정책이 빈약하기 때문에 연말정산에 각종 공제를 두는 방식으로 부족한 점을 보완한 측면이 있다.

이 때문에 정부는 연말정산 제도를 정책 수단으로 적극 이용한다. 일례로 6세 이하 자녀를 둔 가구주에게 조건 없는 추가 공제 혜택을 처음 제공했을 때는 저출산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2002년이다. 2007년부터는 다자녀 추가 공제가 신설되며 세금 감면을 저출산 정책에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현 정부는 청년 일자리 문제, 중소기업의 인력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청년 중소기업 취업자에 대한 소득세 감면 폭을 확대하고 있다. 예를 들어 수혜 대상 연령을 종전 15∼29세에서 15∼34세로 확대하는 식이다. 월세액 세액공제 역시 다주택자 세원 양성화라는 정부 목표와 월세가 부담된다는 납세자 요구가 맞물리면서 해가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반면 고소득층에 더 큰 부담을 늘려야 한다는 사회적 목소리가 커지면서 연말정산 공제는 소득공제에서 세액공제로 기조를 옮기고 있다. 일반적으로 소득공제는 고소득자에게 유리하다.

○ 한번 만든 공제 혜택은 없애기 어려워

연말정산 공제는 소득세 감면과 관련 깊기 때문에 한번 만들고 나면 다시 없애거나 축소하기 힘들다. 공제 항목이 너무 늘어나면 세원을 확대하는 게 아니라 세원을 축소하는 역효과를 낳는다. 특히 표심을 의식한 정치권은 소득세 감면에만 열심일 뿐 정책적 목표를 달성한 공제 제도를 폐지하는 것에는 나서지 못한다. 그 대신 이런저런 구실로 늘리려는 방법만 찾는다.

납세자 역시 공제 혜택이 축소되는 걸 원치 않는다. 2017년을 기준으로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소득세 부담률이 4.5%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8.3%)의 절반 수준인 건 이 같은 이유가 한몫했다.

현 정부도 공제 항목 개편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갖고 있지만 실행에는 나서지 못하고 있다. 올해 3월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납세자의 날 기념식에서 “신용카드 소득공제와 같이 도입 취지가 어느 정도 이뤄진 제도에 대해서는 축소 방안을 검토하는 등 비과세, 감면제도 전반에 대한 종합적인 검토를 거쳐 적극 정비해 나가겠다”고 했다.

홍 부총리의 발언이 알려지자 직장인들 사이에선 “사실상 증세”라는 말이 나왔다. ‘제로페이’에 공제 혜택을 몰아주기 위해 신용카드 혜택을 폐지하려는 꼼수라는 지적도 있었다. 결국 기재부는 홍 부총리 발언 일주일 만에 “경제 여건을 봐서 결정하겠다”고 했고, 그로부터 이틀 뒤 여당에서는 “2022년까지 공제 혜택 연장”으로 못 박았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부 교수는 “신용카드 소득공제는 전 세계에서 우리나라에만 있지만 이미 전 근로자 1800만 명에게 적용하는 세제 혜택이 된 이상 이를 건드린다는 건 조세저항 촉발을 의미한다”고 했다. 한번 만들어진 공제 혜택을 없애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2019년에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세종=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13월의 보너스#연말정산#맞춤형 원천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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