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정이 불공정한 제로페이[오늘과 내일/김광현]

  • 동아일보
  • 입력 2019년 7월 1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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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페이 전담기업까지 만들겠다며 은행들에 출연금 강요… 독재시절인가

김광현 논설위원
김광현 논설위원
원래 안 되는 걸 억지로 하다 보면 무리수가 동원되기 마련이다. 최저임금이 너무 올라 자영업자들이 못 살겠다며 거리로 뛰쳐나오니 대통령 공약을 차마 손댈 수는 없고 그렇다면 다른 걸로 보상해 주겠다며 불만 달래기용으로 급히 들고나온 것이 신용카드 수수료 절감 방안인 제로페이다.

중소벤처기업부와 서울시가 지난달 제로페이 전담 민간기업을 설립하겠다고 했다. 박영선 장관이 새로 부임한 중기부가 ‘제로페이 간편결제추진단’ 명의로 IBK기업은행 같은 국책은행과 신한은행 KEB하나은행 같은 주요 시중은행 등에 공문을 보내 10억 원씩 총 300억 원대의 출연금을 요청한 것이 확인됐다. 출연금은 법인 설립 후 기부금으로 처리해주겠다고 한다.

제로페이는 가맹점 소비자 양쪽 모두에게서 돈을 안 받는 것이니 당초부터 이익을 낼 수 없는 사업구조다. 이 사업으로 돈을 많이 벌면 도리어 원래 취지에 어긋난다. 이익을 내지 않는 민간기업이라니 네모난 동그라미 같은 그 자체로 어불성설이다. 사업성이 없는 데다 정부 간섭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업을 민간기업이 제 정신이라면 제 돈 내고 할 리가 만무하니 국책 은행, 민간 은행들의 팔을 비튼 것이다.

대부분 신용카드 회사를 계열사로 운영하고 있는 은행들은 경쟁관계에 있는 다른 회사의 결제시스템을 자기 돈까지 줘가면서 밀어줘야 하는 기막힌 상황이다. 이 정도면 말이 좋아 기부금이지 칼만 안 든 강도나 다를 게 뭐가 있느냐는 게 시중은행의 반응이다. 그래도 겉으로 말도 못 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다. 같은 공무원인 금융위원회에서조차 지금이 군사독재 시절도 아니고 중기부나 서울시가 어떻게 이런 발상을 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최근 기획재정부가 업무추진비 등 관서 운용 경비 지급에 사용하는 정부 구매카드에 신용카드 직불카드 외에 제로페이를 포함시켰다. 카카오페이나 삼성페이처럼 민간에도 비슷한 서비스가 있는데 제로페이만 포함시킨 것은 계열사에 일감 몰아주기나 다름없다. 민간기업 같으면 당장 공정거래위원회 조사 대상감이다. 서울시는 가급적 제로페이를 우선 사용하고 간부들은 사용 실적을 보고하라고 했다니 최근 발효된 직장 내 괴롭힘 방지법에 안 걸리는지 모르겠다.

제로페이가 처음 등장한 지난해 12월부터 올해 5월까지 사용실적이 36만5000건, 57억 원이다. 홍보나 가맹점 유치에 쓴 예산 98억 원에도 턱없이 못 미친다. 같은 기간 신용카드가 49억 건에 266조 원, 체크카드가 32억 건에 74조 원인 것과 비교하면 얼마나 초라한 수준인지 알 수 있다.

제로페이는 처음부터 정부가 나랏돈과 세금 혜택 같은 행정력을 무기로 민간인들의 결제 시장에 뛰어들었으니 심판이 선수로 뛰는 불공정 게임이다. 심판까지 뛰었는데도 실적은 거의 제로이다 보니 정부 스스로 비판해왔던 온갖 형태의 불공정 행위를 스스로 저지르고 있는 것이다.

급조된 정책이 효과가 나오기를 기다리며 끝까지 밀고 나가는 것도 뚝심 행정이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최저임금 인상의 결과는 이제 모두들 알고 있다. 정부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 이제 와서 동결이니 인상 최소화니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제로페이는 그 참상을 보고도 실패에서 교훈을 얻지 못하고 있다. 아인슈타인은 ‘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을 두고 미친 짓(Insanity)’이라고 했다. 제로페이로 자영업자를 위하는 정부, 시장(市長)이라는 정치 홍보는 충분히 됐을 것이다. 이 정도 했으면 많이 해본 것 아닌가. 국가를 위해서나 납세자를 위해서나 하루라도 빨리 접는 게 어떨까 싶다.
 
김광현 논설위원 kkh@donga.com
#제로페이#출연금 강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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