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수설/권순활]재벌 총수 자녀의 초고속 승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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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부장으로 일하던 약 8년 전 어느 그룹의 ‘오너 3세’ 고위 임원을 만난 적이 있다. 당시 30대였던 그가 동석한 훨씬 연상(年上)의 임원에게 하는 말투는 대체로 반말이었다. 그날 일을 전해 들은 후배 기자의 반응은 이랬다. “그 정도면 비교적 ‘양질’입니다. 임직원을 머슴 다루듯이 대하는 총수 자녀도 있는데요.” 땅콩 회항 사건으로 치명상을 입은 조현아 전 대한항공 부사장도 예전부터 이런저런 뒷말이 많았다.

▷‘조현아 파문’에서 민낯을 드러낸 일부 재벌 3, 4세의 특권의식과 안하무인 행태는 어디에서 왔을까. 창업 2세대만 해도 어린 시절 창업자인 부친의 고생을 지켜본 경험이 적지 않다. 그러나 3, 4세대는 태어나면서부터 ‘그들만의 성(城)’에 갇혀 왜곡된 선민(選民)의식에 젖을 위험성이 높다. 다만 행동을 더 조심하고 예의를 지키는 3, 4세도 있어 싸잡아 매도하는 것은 금물이다.

▷30대 그룹 오너 3, 4세 임원 32명이 입사 후 임원 승진까지 걸린 기간이 평균 3.5년이라는 조사 결과가 나왔다. 신세계 정용진 부회장과 정유경 부사장, 조원국 한진중공업 전무 등 9명은 입사하면서 바로 ‘기업의 별’인 임원을 달았다. 현대백화점 정지선 회장과 정교선 부회장은 1년 만에 임원이 됐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9.4년), 정의선 현대자동차 부회장(5.8년), 구광모 LG 상무(8.3년) 등 핵심 그룹 3, 4세는 평균보다는 늦게 승진했다.

▷민간기업에서 대주주인 총수 자녀가 빠르게 승진하는 것 자체만을 놓고 비난을 퍼부을 수는 없다. 그러나 기업과 세상을 잘 모르는 젊은 3, 4세를 너무 일찍 고위직에 앉히면 득보다 실이 많다. 과거 일부 기업인은 학업을 마친 자식을 국내외의 다른 기업에 보내 몇 년간 ‘계급장을 떼고’ 일을 배우게 한 뒤 회사로 불러들였다. 입사 후에도 일정 기간 해당 기업의 핵심 업무를 현장에서 경험하게 하는 과정도 거쳤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한국 재계는 총수 자녀의 경영 참여나 초고속 승진과 관련해 귀중한 교훈을 얻어야 할 것이다.

권순활 논설위원 shkwo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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