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풍속 이야기 20선]<4>한국의 전통연회

  • 입력 2009년 1월 23일 02시 58분


◇한국의 전통연회/전경욱 지음/학고재

《“우리의 전통연희는 주변 여러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그 독자성과 우수성을 갖춰 왔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은 중국과 서역의 악(樂)을 받아들여 우리의 예술 생활을 풍부하게 가꿔 나간 것으로 나타난다. 나아가 우리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외래 연희를 수용해 연희 문화를 풍부하게 영위하면서 그것을 우리 취향에 맞게 개작하고 한국화해 새로운 연희 문화를 창출해 왔다.”》

서커스를 닮은 삼국시대 산악-백희

불교와 유교, 한자 등 공동의 문화유산을 가진 동아시아 국가들은 연희(演戱) 문화에서도 동일한 뿌리를 바탕으로 각각의 연희 문화를 만들었다. 저자는 “산악(散樂) 또는 백희(百戱)로 불리는 공동의 연희가 동아시아 각국에서 발전되고 재창조됐다”고 말한다.

산악은 중국 고대의 악무(樂舞)를 지칭하는 용어로 원래 주나라의 민간 악무를 가리키던 말이다. 백희는 고대의 악무잡기(樂舞雜技)에 대한 총칭이다. 산악과 백희의 종목은 오늘날의 서커스와 비슷하다.

방울을 여러 개 공중에 던졌다가 받기, 줄타기, 타오르는 불을 밟고 걷기 같은 곡예와 각종 동물로 분장한 가면희가 있었다. 칼 삼키기, 입에서 불 토해내기 같은 환술(幻術)과 노래 부르고 춤추는 가무희도 빠지지 않았다.

산악, 백희의 전통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의 대표적 전통연극인 노가쿠(能樂), 노쿄겐(能狂言), 가부키(歌舞伎) 등을 탄생시켰다. 한국에선 삼국시대에 산악과 백희가 성행했고,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는 잡희, 산대잡극, 가면극, 판소리 등으로 발전했다.

전통연희 연구에 몰두해온 저자는 230컷에 이르는 풍부한 도판을 통해 한국 전통연희의 생성 과정과 시대별 연희의 다양한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이 중국, 서역과 연희를 교류한 예는 고구려 고분벽화에 잘 나타나 있다. 저자는 “고구려 각저총의 벽화에 그려진 씨름꾼 가운데 매부리코를 한 서역인이 있고, 안악3호분 벽화 중 가면희도(假面희圖)에도 외국인으로 보이는 춤꾼이 등장하는 등 고구려의 대외 교섭이 매우 활발했다”고 설명한다.

한국은 중국의 연희를 받기만 한 게 아니라 중국에 전하기도 했다. 신라의 ‘입호무’와 ‘신라박’이라는 종목이 대표적이다. 입호무는 조금 떨어진 두 개의 탁자 위에 항아리를 하나씩 두고, 그중 한 항아리로 연희자가 들어갔다가 다른 편으로 나오는 환술이고, 신라박은 동물 가면을 착용한 가면희다.

당나라, 서역과 활발히 교류한 통일신라 때는 처용무에서 교류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저자는 “아직 이렇다 할 정설이 없으나 깊이 파인 눈과 높은 코, 기이한 의관에서 처용을 서역 계통의 외래인으로 짐작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최치원은 ‘삼국사기’ 잡지에 당시 연희들을 본 감상을 ‘향악잡영 5수(鄕樂雜詠五首)’라는 시로 남기기도 했다.

‘몸을 돌리고 팔을 흔들며 방울 놀리니/달은 돌고 별은 떠다녀 눈 안에 가득하네/의료의 재주인들 이보다 나으랴/동해 바다 파도 소리 잠잠하겠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중시하는 기풍으로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성대히 거행했고, 송나라로부터 아악과 교방가무희 등 선진문화를 수용했다. 조선시대에 들어선 유교적 가치를 중시하는 분위기가 전통연희에도 반영됐다. 저자는 “불교와 연관 있는 연희는 대폭 축소된 대신 과거 급제자 축하 잔치인 삼일유가(三日遊街)와 중국 사신 영접 행사 같은 것을 성대히 벌였고 민간의 경제력이 높아짐에 따라 사대부가의 잔치에서 연희를 하는 일이 많아졌다”고 설명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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