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질서는 유전에서” 지구촌 ‘힘의 축’ 요동

  • 입력 2007년 11월 14일 03시 1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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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C서 증산 가능성 논의”모하마드 알올라임 쿠웨이트 석유장관 직무대행(왼쪽)과 알리 알누아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11일 쿠웨이트 국제공항에서 나란히 걷고 있다. 두 장관은 13일 “필요하다면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 증산 가능성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쿠웨이트시티=AFP 연합뉴스
“OPEC서 증산 가능성 논의”
모하마드 알올라임 쿠웨이트 석유장관 직무대행(왼쪽)과 알리 알누아이미 사우디아라비아 석유장관이 11일 쿠웨이트 국제공항에서 나란히 걷고 있다. 두 장관은 13일 “필요하다면 석유수출국기구(OPEC)가 석유 증산 가능성을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쿠웨이트시티=AFP 연합뉴스
러 “우리도 기름 나온다” 美 일방주의에 맞서

남미 좌파정권들 ‘석유 민족주의’로 독자 위상

소외받던 중앙亞-아프리카에도 강대국 러브콜

“냉전시대 최고의 무기는 핵무기였지만 이제 무기는 석유다.”

“21세기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대량살상무기도 아니고 급진 이슬람단체도 아니다. 석유를 향한 중국의 탐욕이다.”

국제 유가가 고공 행진을 계속하면서 이런 화두가 국제사회에서 대두하고 있다. ‘석유 정치학(petro-politics)’의 관점에서 국제질서를 따져 보는 움직임이 새삼 일고 있는 것이다.

석유수출국기구(OPEC) 회원국 정상들은 17일 회의를 열고 원유 증산 문제를 논의한다. 하지만 이미 OPEC 회원국들은 “현재의 수요 공급에는 문제가 없다”며 증산에 회의적인 전망을 흘리고 있다.

최근의 고유가는 수급 요인이 아니라 ‘지정학적 요인’에 따른 것이라는 지적이 많다. 즉, 중동의 정정 불안, 러시아와 중남미 산유국들의 ‘자원 민족주의’가 고유가를 부추기고 있다는 것이다.

○ “석유가 곧 국력”

우고 차베스 베네수엘라 대통령은 지난해 유엔 연설에서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을 ‘악마’라고 비난했다.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를 향해선 “지옥에나 가라”고 독설을 퍼부었다.

마무드 아마디네자드 이란 대통령은 지난해 말 홀로코스트(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량 학살)를 사실이 아닌 ‘신화’라고 주장했다.

미국의 ‘지속 가능한 에너지·경제 네트워크(SEEN)’의 공동 소장인 나디아 마르티네즈 씨는 최근 한 기고에서 “유가가 배럴당 20달러였다면 그들이 이런 말을 할 수 있었을까”라고 의문을 제기했다.

고유가 시대에 석유를 가진 자의 자신감은 이처럼 거침이 없다. 이런 현상이 특히 두드러지는 곳은 라틴 아메리카. 고유가로 재정이 두둑해진 이들 국가의 대미 의존도는 크게 낮아졌다.

부시 대통령은 이라크전쟁이 진정되지 않자 지난해 말 ‘석유 공급처의 다변화’를 선언했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수입하겠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저유가 시대엔 미국의 요구에 순순히 따랐던 중남미 국가들의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과거와 달리 미국에 맞서면서 역내 단합을 꾀하고 있는 것.

베네수엘라는 중미 국가들에는 석유를 할인 가격으로 공급하는 협정을 맺었다. 나아가 남미 12개국은 유럽연합(EU)과 비슷한 ‘남미연합(Unisur)’ 결성을 추진 중이다. 연합 결성의 가장 큰 목적은 통합된 에너지 정책을 수립하는 것이다.

민심도 같은 방향으로 기울었다. 남미 각국의 국민은 자족과 자주를 주장하는 좌파 정권의 손을 잇달아 들어 줬다.

유럽이 수입하는 에너지의 60%를 공급하는 러시아의 힘도 한층 세졌다. 러시아는 동유럽에 미사일 기지를 설치하려는 미국의 ‘전통적 공세’에 맞서 유럽의 에너지를 통제하는 ‘현대적 방어’로 대응하고 있다.

지난주 미국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는 “미국은 오일머니로 미국 채권을 대량으로 사들이는 러시아를 경계해야 한다”는 충고도 나왔다.

○ ‘세계화’도 석유 앞에선 무력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은 1990년 초반 세계화의 기치를 내세운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등에 절대적으로 끌려 다녔다.

아르헨티나 베네수엘라 등은 외환 원조를 받기 위해 이들 기관의 경제 개방, 민영화 요구에 따라 석유기업을 다국적 기업에 넘겨줬다. 브라질은 ‘석유는 국가 재산’이라고 규정해 놓은 헌법까지 개정하면서 외국에 에너지 시장을 개방했다.

그러나 상황은 달라졌다. 볼리비아는 최근 빼앗겼던 회사를 되찾는 데 주력하고 있다.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은 2005년 대선 때 가스와 석유 산업에 대한 지배권 회복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됐다.

차베스 대통령도 지난해 재선 직후부터 엑손모빌 등 다국적 기업에 석유 산업의 주도권을 내줬던 과거 계약을 갱신하는 데 주력했다. 그 결과 올 7월 대부분의 외국 기업이 새 계약을 체결하는 데 동의했다.

이제 다국적 기업들은 오히려 새로운 유전 개발에 참여하기 위해 남미 국가들의 눈치를 보는 처지가 됐다.

○ 석유 향해 ‘헤쳐 모여’

중앙아시아 지역에서 10년 넘게 활동한 언론인 스티브 레바인 씨는 최근 중앙아시아 지역을 ‘석유 전쟁’이 가장 뜨거운 장소로 꼽았다. 이곳의 ‘석유 헤게모니’를 차지하려는 강대국의 신경전이 치열하다는 지적이다.

미국은 이 지역의 석유 자원에 대한 접근을 쉽게 하기 위해 아프가니스탄의 두 공군 기지에 8300만 달러를 쏟아 부어 시설을 개·보수하고 있다. 러시아와 중국은 이에 대항해 전략적 제휴를 맺었다.

아프리카에서도 석유를 둘러싼 강대국 간의 충돌이 여기저기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은 서아프리카에서 새로 발견되는 대규모 유전지대 주변에 군 기지를 설치하고 있으며 중국은 아프리카 산유국에 무기까지 원조하며 공을 들이고 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원유 생산 정점 찍었다?▼

전문가 “2030년엔 하루 생산 절반 이하로”

석유업계 “남-북극 등 미개발 유전 수두룩”

이달 초 영국에선 ‘꾸미지 않은 자각-석유의 붕괴(A Crude Awakening-The Oil Crash)’라는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이 개봉됐다. 석유가 고갈된 뒤의 상황을 가상해 본 영화다.

영화는 아시아, 아프리카에서 기름 부족으로 인해 소요가 잇따르는 장면을 예상해 보여 준다. 소요는 국제 분쟁으로 이어져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을 것이란 전망도 담고 있다. 인도, 방글라데시 등 아시아 국가에선 발전기를 돌릴 석유가 부족해 물을 퍼 올리지 못해 식량 생산이 줄어들 것으로 예상됐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영화 내용을 소개하면서 “이미 미얀마에서 석유 값 파동이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최근의 고유가가 수요 공급의 불일치 때문이라는 해석이 나오는 가운데 “영화 속의 내용이 곧 현실이 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전망이 큰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이른바 ‘피크 오일(peak oil) 이론’이 다시 부상하고 있다. ‘원유 생산이 정점에 가까워졌으며 조만간 급감할 것’이라는 이 이론은 최근 몇 년 사이 에너지 연구 분야에서 주목받고 있다.

찬반 논란은 뜨겁다.

미국 포스트카본연구소의 리처드 하인버그 연구원은 최근 “세계 하루 석유 생산량이 2010년을 기점으로 감소해 2030년에는 하루 3000만 배럴 수준으로 줄어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 경우 유가는 배럴당 200달러도 넘을 것으로 보인다. 현재 하루 생산량은 8500만 배럴 수준이다.

영국 BP캐피털의 분 피킨스 회장도 “이미 세계의 하루 석유 생산량은 정점에 이르렀다”고 지적했다. 지난달 말 열린 ‘중국 에너지 전략 국제 포럼’에선 중국석유대학의 팡슝치 부총장이 “중국은 2015년 오일 피크에 도달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쿠웨이트의 실제 매장량이 보고된 양의 절반밖에 되지 않는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브리티시 페트롤리엄(BP)의 피터 데이비스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절대적인 에너지 피크는 존재하지 않으며 앞으로 40년 동안 석유 고갈 걱정은 없다”고 반박했다. 중동과 미국의 대형 석유회사들도 ‘피크 오일’에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정유회사 아람코의 압달라 주마 회장은 9월 석유수출국기구(OPEC) 세미나에서 “세계에는 현재 생산 속도로 한 세기 이상을 생산할 수 있는 원유가 남아 있다”고 주장했다.

석유 업계는 또 “아직 미개발 유전이 많으며, 특히 남극과 북극에 많은 석유가 매장돼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금동근 기자 gold@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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