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민 칼럼]대통령의 편지

  • 입력 2003년 6월 9일 18시 3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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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은 밤에 편지쓰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지난번 ‘잡초를 뽑자’며 수백만명의 국민에게 보냈던 편지나 이번 ‘이기명 선생님’ 앞으로 보낸 편지의 말미에는 모두 ‘새벽’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다. 왜 굳이 글 쓴 시각을 알리려 했는지 모르지만 어쨌든 이 글을 읽는 국민에게는 ‘아닌 밤중의 홍두깨’ 같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사춘기 시절 밤을 새워 글을 써 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밤이란 시간은 사람을 감상적으로 만들기 때문에 한밤중에 정성들여 쓴 글이라도 한숨 자고 일어나 읽어 보면 유치하고 후회스러운 내용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대개 그런 편지는 우체국 근처에도 못 가고 버려지게 마련이다. 그러나 감정 실린 글을 바로 그 자리에서 실시간으로 배달하는 인터넷은 차분한 마음으로 내용을 재검토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점에서 조심스러운 매체이다. 전 국민이 보게 될 편지를 대통령이 새벽에 써서 인터넷으로 내보내는 것은 그래서 적절한 일이 아니다.

▼개인 感想보다 국가현안이 우선 ▼

개인적인 편지를 개인에게 보내지 않고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청와대 홈페이지에 올린 것도 생각해 볼 문제지만 대통령이 새벽까지 고뇌하면서 내놓은 글이 원망과 증오심에 가득 찬 사신이라면 국가지도자의 글로 걸맞은 것이라 보기 어렵다. 지금 대통령이 고뇌해야 할 대상은 한창 나라를 소란스럽게 하고 있는 교육행정정보시스템(NEIS) 문제나 각종 시위 그리고 가라앉고 있는 경제와 북한 핵문제 등 국민을 불안하게 하고 있는 현안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인 후원회장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는 모습은 자칫 대통령이 국가 대사보다 개인적 정리에 지나치게 함몰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하다.

편지의 내용들을 보면 과연 대통령이 느껴야 할 책임감은 어디 있는지, 대통령이 지켜야 할 리더십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의아해진다. 특히 대통령으로서 역사적인 일본 국빈방문을 앞두고 생각할 것도 많고 준비할 일도 많았을 텐데 떠나기 바로 전날 밤 새벽까지 생각한 것이 후원회장의 억울함 정도라면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다. 정상회담을 앞둔 대한민국 대표선수의 머릿속에 들어 있어야 할 내용이 뒤바뀌어 있을 경우 국가의 이익과 나라의 장래도 걱정되는 일이다.

미국이 내분 상태에 있을 때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국민을 이렇게 달랬다. “우리들은 적이 아니라 벗이 되어야 한다. 격분이 끓어오르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는 애정의 결속이 끊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그는 미국 건국신조의 존속을 위해 국민이 더욱 헌신할 것을 호소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도 ‘노변한담’이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통해 다정한 음성과 장중한 어조로 국민의 단결과 애국심을 고취시켰다. 영국의 지도자 윈스턴 처칠 역시 고통의 시기에 ‘피와 땀과 눈물’을 요구하는 연설을 통해 국민에게 인내와 용기를 북돋워 주었다. 우리가 우리의 지도자로부터 받고 싶은 편지나 듣고 싶은 연설은 이러한 것들이다.

▼포용의 마음 담겨야 국민들 감동 ▼

노 대통령은 실패한 대통령이 되는 것이 두렵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러나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만으로 성공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 지금 이 시점에서 노 대통령에게 가장 긴요한 것은 자기 억제력이다. 물론 우리가 자신을 억제할 만큼 수양이 된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출했으면 더 좋았겠지만 만일 그러지 못했다면 국민은 노 대통령 스스로가 마음을 다룰 수 있도록 노력해 주기만 기대할 수밖에 없다.

대통령은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만큼 막중한 책임을 갖고 있는 자리이다. 그런 직책을 맡은 사람이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경우 국가적 재앙과 국민적 비극은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다. 노 대통령이 하고 싶은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구분해야 하는 것은 그가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 위해서뿐 아니라 온 국민의 안녕을 위해서도 필요하기 때문이다. 지도자의 성격 때문에 국민이 불안해 한대서야 제대로 된 나라라고 할 수 있겠는가. 어려운 일이겠지만 대통령은 국가를 위해 필요할 경우 성격을 고칠 의무가 있다. 그렇게 되면 국민은 포용의 마음이 담겨진 대통령의 편지를 받고 감격하게 될 것이다.

이규민 논설위원실장 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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