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지킴이]명의 의형제 김춘추 김성윤 박사

  • 입력 2003년 1월 19일 17시 32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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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계의 아웃사이더 의형제 김춘추 교수(오른쪽)와 김성윤 원장이 서울 강남의 한 일식집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이들은 밤늦게까지 맥주를 마시며 의료계와 환자 걱정을 했다. 박영대기자
의료계의 아웃사이더 의형제 김춘추 교수(오른쪽)와 김성윤 원장이 서울 강남의 한 일식집에서 오랜만에 만났다. 이들은 밤늦게까지 맥주를 마시며 의료계와 환자 걱정을 했다. 박영대기자
가톨릭대 의대 내과 김춘추 교수(59). 1983년 국내 처음으로 골수 이식에 성공했고 지금까지 백혈병과 악성림프종 등 혈액질환 치료 분야에서 숱한 업적을 남겨 세계적인 명의로 꼽힌다. 그는 97년부터 최근까지 ‘요셉병동’ ‘어린 순례자’ 등 5권의 시집을 펴낸 중견시인이기도 하다. 김성윤 류머티스내과 원장(54)은 88년 국내 처음으로 한양대병원에 류머티스내과를 개설해 이 분야를 국내에 뿌린 ‘전설’의 주인공. 2001년 류머티스 병원장 자리에서 갑자기 ‘하산(下山)’한 뒤 개원해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병원장을 그만두기 직전 대기 환자가 4만명이나 됐다. 그런데 의료계에서도 두 대가(大家)가 수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는 의형제 사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닮은 두 사람=둘은 모두 불우한 성장 환경을 이겨내고 남들이 가지 않은 길에 뛰어들어 불모지와도 같은 분야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성장시켰다. 일부 대학 교수들이 주류를 형성하고 있는 폐쇄적인 의학계에서 눌리고, 짓밟히고, 무시당하면서도 그들이 범접하지 못하는 경지를 이뤘다는 점에서도 닮았다.

‘양김(兩金)’은 또 모두 ‘문과적 인간’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김 교수는 고교 때 문학동아리 활동을 했으며 여수고 2학년 때에는 스님이 되려고 송광사의 암자로 출가하기로 했다. 그리고 30여년 뒤 자신의 환자였던 시인 김형영과 그의 친구인 서정춘, 박건안 등과 교류하면서 다시 시의 세계에 혼을 던졌다.

김 원장은 의사 중 드물게 고등학교 문과 출신이다. 그는 개원 당시 주위로부터 ‘왜 정상의 자리에서 내려오느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시인 이형기의 시 ‘낙화’를 소개하며 미소짓기만 했다.

둘은 전공의를 마치고 인기과였던 심장내과를 지원했다가 꿈을 이루지 못하고 대신 지독한 노력으로 미개척 분야를 개간했다는 점도 공유한다.

김 교수는 80년 성모병원이 서울 중구 명동에 있을 때 진료실 밖에 ‘혈액질환자가 아니면 안 본다’는 안내문을 써 붙였다. 당시 내과 의사가 잘 치료되지도 않는 혈액질환만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83년 국내 최초로 골수이식에 성공한 뒤 백혈병 환자가 찾아오면 “당신 이제 살았다”면서 눈물을 글썽이며 포옹부터 했다. 김 교수가 지금도 걸핏하면 악수하고 포옹하는 습관은 그때 생긴 것이다.

김 원장은 류머티스질환을 알리기 위해 무작정 방송국을 찾아가서 ‘한번만 나오게 해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또 이 분야에 무지한 다른 의사들을 일일이 찾아가 환자를 보내달라고 애원하기도 했다.

두 김 박사는 후배들에게 엄격하기로도 유명하다.

김 교수는 밤에 입원한 환자의 혈소판 수치가 위험한 정도로 내려가면 당장 후배의 정강이를 걷어찼다. 환자의 혈액이 모자라면 제자들의 피를 뽑았다. 김 원장은 오후 11시 이전에 연구실의 불이 꺼져 있으면 다음날 제자들에게 불호령을 쳤다. 그래서 두 사람의 제자들은 모두 ‘베스트 오브 베스트’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인연과 사랑=두 사람 모두 선친(先親)의 권유에 따라 의사의 길을 걷게 됐다.

김 교수는 암자에서 지내다가 승려도첩을 받기 위해 주민등록등본을 떼려고 여수에 내려왔다가 아버지에게 붙잡혔다. 아버지는 “문학도 종교도 좋지만 의사라는 길은 어떻겠느냐”고 물었다. 김 원장은 삼수(三修) 시절 당구장에서 살며 방황할 때 아버지가 불러 문과에서 이과로 바꿔 의사의 길을 갈 것을 권유했다.

의료계에서도 아는 사람은 드물지만 두 박사의 선친은 사실 친구 사이였다. 아마 두 선친이 만나서 아들을 모두 의사로 만들자고 ‘작당’ 했을지도 모른다.

선친들은 1933년 대구사범학교에 입학한 동기동창생으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한 해 후배였다. 김 교수의 선친은 일본 게이오대 법학과, 김 원장의 선친은 서울대 약대의 전신인 경성약전을 졸업했다.

그러나 두 선친은 아들에게 단란한 가정을 꾸려주지는 못했다.

김 교수의 아버지는 전쟁 중 좌익 활동에 연루돼 집을 떠나 있을 수밖에 없었고 이 때문에 김 교수는 어린 시절 상당 기간 아버지의 얼굴을 그리워만 하면서 자랐다. 그는 외가에서 주로 외할머니의 보살핌을 받았다. 그의 시에는 고향에서 ‘빨갱이의 아들’이라는 점 때문에 고통받았던 현실이 곳곳에 스며있다. 김 박사의 선친은 김 박사가 아칫걸음을 걸을 때 이혼했다. 김 박사의 선친은 생계를 위해서 부산으로 내려갔고 외할머니는 “딸 대신 외손주를 키우겠다”며 서울에서 어린 성윤을 키웠다.

이런 평탄하지 못한 성장기 탓이었을까. 그들은 학창 시절 철저히 방황했고 나중에는 기존 질서에 도전해 이를 뛰어넘은 ‘아웃사이더’로서의 기질을 보였다.

두 김 박사는 서로의 얘기를 들으면서 성장했다. 김 교수는 “아버지는 좌익 전력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어서 가족은 늘 가난했다”면서 “하지만 선친의 자식 사랑은 유별나서 내가 의대에 들어가자 김 원장의 선친에게 등록금을 받아오기도 했다”고 말했다.

김 원장은 “아버지는 늘 ‘춘추는 기인이면서 천재야’라고 말씀하셨고 춘추 성님이 골수 이식에 처음 성공했다는 소식에 당신의 일인 양 기뻐했다”고 전했다.

두 사람은 의사가 되고 나서 내과학회에서 우연히 만났다. 그리고 곧바로 형 아우 사이가 됐다. 지금도 수시로 만난다. 김 원장은 “성님이 맥주를 덜 마셔야 할텐데”하고 걱정한다.

“해방 공간에서 두 분이 좌와 우로 갈렸지만 둘은 결국 친구였습니다. 두 분은 일제 암흑시기를 벗어나기 위해 다른 방향으로 민족애를 발휘했을 따름입니다. 당시 지식사회에서는 좌익이 유행이기도 했지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두 편으로 나눠 서로를 적대시하는 것을 보면 안타깝습니다.” (김 원장)

“선친들이 우리들을 왜 의사로 만들었는가를 늘 생각합니다. 전쟁터에서 의사는 좌와 우에서 모두 필요한 존재여서 생존에 유리하다는 것을 공감해서일 수도 있죠. 또 인술은 이념과는 달리 실제로 사람들을 도울 수 있습니다. 요즘엔 제대로 환자를 보기에 제약이 너무 많은 것이 슬플 따름입니다.” (김 교수)

이성주기자 stein33@donga.com

◆ 김성윤 원장이 관절염 환자에게

▽병과 벗하라=류머티스 관절염 환자는 민간요법이나 특효약에 현혹되지 말라. 장기 치료로 병을 관리한다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약물치료와 물리치료를 병행하면 증세 완화와 호전에 도움이 된다. 관절 주사는 일시적으로 통증을 가라앉히고 관절의 변형을 막을 수 있지만 1년에 5회 이상 사용하면 해로울 수 있다. 관절이 심하게 상한 경우에는 수술을 받아야 한다.

▽골고루 먹어라=관절염에 좋은 특별한 음식은 없다. 녹황색 채소와 생선을 포함, 음식을 골고루 규칙적으로 먹는다. 다만 짠 음식은 좋지 않으므로 싱겁게 먹는 습관을 들인다.

▽누워있지만 말고 움직여라=운동은 가능하면 자신의 상태에 맞춰 하는 것이 좋다. 하중을 받지 않는 운동이 좋다.9 무릎 관절염 환자는 눕거나 의자에 앉은 채 무릎을 폈다 구부리는 행동을 반복하거나 실내 자전거 타기, 수영, 수중 보행 등을 한다. 수영은 자유형이 좋고 평형은 해롭다.

▽걷는 요령=한쪽으로 무거운 것을 들고 걷지 않도록 한다. 한쪽 무릎이나 엉덩이에만 관절염이 있다면 다른 쪽으로 지팡이를 짚도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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